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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Jul 20. 2020

서울에서의 일신

1988년 12월-남편의 노트에서(1)

서울을 떠나는 것이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은

당신에게 한 장의 편지도 띄우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나는

지난 밤새 당신에게 유행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을 보내고 안개가 참 고운 강변도로를 달려 귀가한 후,

나는 겨울밤의 소중한 감정들이 어떠한 색깔과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참 어리석은 노력임을,

지금, 햇살이 창틈을 넘어오는 겨울날

오후에 깨닫습니다

도대체 몇 마디의 관념적인 언어들과 서정적인 언어들로 나의 내부에서 

진행 중인 전면전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온 밤새 두근거림 속에서 적었던 편지들은 부치지 않기로 합니다.


나의 지인

보다 치열한 편애를 위하여

보다 진실한 그리움을 위하여

나는 세월 속에서 당신을 만나기로 합니다.

바로 당신에게서 나의 본질을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건 즐거운 불안감이며 머언 먼 강설의 예감 같은 설렘입니다.


이제 나는

펀펀한 흙길이 아닌 칼날 위에 서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랑할 자유밖에, 모든 것이 속박의 굴레일 수도 있는 삶.


그러나 어느 날

새하얀 눈부심으로 다가서게 될 사랑할 자유와,

도래할 전면전의 기쁨.


이제 나는

펀펀한 흙길이 아닌 칼날 위에 서 있습니다.

그건 바로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1988.12.20 겨울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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