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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Sep 05. 2024

고사난자

계류유산의 과정들

사람들에겐 저마다 다시 마주하기 고통스러운 기억들, 급하게 덮어놔서 먼지 쌓인 기억들이 있다.

나에겐 그런 기억 중 하나가 유산이었다.

아이를 원했던 모든 부부에게서 유산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고통일 것이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보육학과까지 연계전공을 하며 보육교사 자격증을 딴 것도 순전히 아이들이 좋아서였다.

아동복지와 가족복지를 하고 싶었던 것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걱정이 있었다. 재생불량성빈혈이 완치에 다다랐지만 언제 안 좋아질지 모르기에 가끔씩 검색창에 '재생불량성빈혈 임신'이나 '혈소판감소증 임신'등을 찾아보기도 했다. 케이스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혈액 수치가 정상과도 같았기에 임신 출산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 같아 나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를 빨리 낳고 싶었던 것에 비해 결혼은 또래들에 비해 늦게 했다. 33세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주변에서 신혼은 누리고 아이를 갖는 것이 좋다기에 아이는 결혼 1년 후 가지기로 계획했다. 

결혼 당시 근무했던 부서는 직원들이 기피하다시피 하는 부서였는데, 업무도 많고 업무 케이스도 다양해서 힘든 부서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매년 늘어나는 업무에 녹초가 되어 퇴근하기 일쑤였지만 같은 팀 직원들과 힘을 내서 매일매일을 견뎌내어갔다. 

그러다 대학병원 정기검진에서 혈소판 수치가 급감한 걸 알게 됐다. 정상수치에서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담당 교수님께서는 다른 수치들은 정상이니 아직은 지켜보자고 하셨다. 17년 전 치료받은 이후 혈액 수치가 꾸준히 올라 최근 10년간 정상수치를 유지했었던 터라 낮아진 수치에 조금 놀랐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외래진료를 보게 됐는데, 볼 때마다 혈소판 수치가 조금씩 떨어지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작년 건강검진에서 헬리코박터균 제균치료를 하다가 설사와 복통으로 약을 하루 만에 중단시켰다고 말씀드리니, 교수님께서 이번 기회에 헬리코박터 제균치료를 다시 해보자고 하셔서 병가를 내고 제균치료를 하기도 했으나 혈소판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나는 계획대로 임신을 시도하기로 했다.

친언니를 비롯해 주변에 친한 언니들이 대부분 시험관으로 아이를 가졌기에 자연임신이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우리 부부에게는 첫 시도만에 임신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얼리 임신 테스트기에 희미한 두 줄을 봤을 땐, 기쁨과 동시에 겁이 났다.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지하철 역사에서 임산부 배지를 받고, 보건소에 임산부 등록을 했을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나는 당시 혈소판이 6만대(정상수치 13만~40만)였고, 힘든 부서에 있었기에 건강관리가 급선무였다.

산부인과 선생님께서도 건강관리를 잘 하라고 하시면서 다음에 올 땐 아기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보통 임신 7주 차에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우리 부부에겐 역사적인 날이라고 생각되어 남편도 휴가를 내고 함께 산부인과로 향했다. 

그날따라 나를 진료해 주던 선생님이 안 계셔서 다른 선생님에게 진료를 보게 되었다.

진료실에서 선생님께서는 초음파를 보기 시작하셨는데, 떨리는 마음으로 함께 모니터를 본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인터넷에서 본 다른 임산부들의 초음파 사진과는 확연히 달랐다. 분명 아기집이 크게 있는데 난황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를 여기저기 살피더니 "없네"라고 말씀하셨고, 옆에 계시던 간호사님이 한 번 더 확인시켜주셨다. "네, 없네요."

 그러더니 남편분과 함께 초음파를 보겠냐고 물으셔서 그러겠다고 했고 남편에게도 빈 아기집을 보여주셨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진료실에 앉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유산입니다."라는 말로 입을 여셨다. 그러더니 유산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을 말씀하기 시작하셨는데, 조용히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와 그 자리에서 통곡하듯이 울어버렸다. 멈추고 싶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혹시 모르니 다음 주에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냐고 물으셔서 그러겠다고 했다. 

나의 케이스는 '고사난자'라고도 하는 케이스인데, 초음파 상에 임신 낭(아기집)은 확인되지만 배아(태아)가 보이지 않는 경우이다. 들어보지도 못한 케이스라서 처음엔 부정했다. 다음 날 다른 산부인과에서 같은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다른 산부인과에서도 빨리 소파술을 하지 않으면 임산부의 건강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셨다. 

다음 주에 원래 진료받던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는데, 역시나 같은 말씀을 하신다. 유산이 되었을 때 아기집이 자연적으로 배출되지 않을 경우 소파술이나 약물 배출을 하게 된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지금 혈소판이 낮으니 약물 배출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진료받은 산부인과에는 분만실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병원을 연계해 주셨다.

이렇게 예쁜 아기집을 만들어놓고 아기는 왜 오지 않았을까...? 

오다가 잠시 길을 잃었나 보다.

다음번엔 길을 잃지 말고 잘 찾아오길...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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