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 모네의 그림은 어떻게 사용되는가
거대출판기업 상속자 데이빗이 소피아에게 자랑하는 이 그림은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강>이다. <바닐라 스카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름다운 그림을 소피아는 골똘히 감상하고 있다. 나도 가끔 아름다운 그림을 다리 아픈줄 모르고 한참을 감상하기도 한다. 또 멋진 음악에 빠져 다음 정거장을 놓치기도 한다. 아 예술이란 무엇이길래. 작품에 심취한 이런 내 모습이 좀 멋지다고 느끼기도 하는데, 그래 이건 내가 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 모두 작품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유년시절의 봤던 만화나 중요한 시기에 만난 음악, 주말에 만나는 넷플릭스 영화까지 여느때 보다 많은 작품들과 함께하는 세상이다.
소피아가 감상했던 모네의 그림은 언뜻 보면 급하게 그린듯 투박하게 붓칠 되어있다. 모네 작품의 특징인 이런 기법은 때론 눈쌀을 찌푸려야할 정도로 불분명하게 그려져있다. 19세기 당시에도 이 그림은 낯선 것이었다. 당시는 사실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화가보다 사실적으로 뽑아내는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미술계는 변화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모네는 사실적인 묘사 이상의 미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했다.
모네는 물감과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왔다. 보통은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작업실에서 색을 칠하지만 그는 모든 과정을 야외에서 마쳤다. 그림은 짧은 시간 동안 거친 붓터치로 그려져 디테일이 뭉쳐있다. 마치 피사체가 움직인 저화소 카메라의 사진같다. 사진이 번저서 쓸모는 없지만 물체의 움직임을 느낄수 있듯이 모네의 붓칠은 이런 생동감을 담고 있다.
하지만 풍경화를 그리는데 움직일만한 것이 무엇이있을까. 이 그림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체가 아니다. 24시간동안 지구에서는 낮에서 밤을 지나며 색의 변화가 일어난다 . 하루중 색의 가장 급격한 변화는 해질녘과 해뜰녘에 이루어진다. 어둡거나 밝은 일정한 빛의 색을 유지하다가 일정한 시간에 몰아치는 변화의 모습은 신비롭다. 알수없이 아름다운 그 순간을 보기위해 먼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낭만적인 순간을 모네는 바닐라 색으로 포착했다.
당시 고전미술은 서사를 담고 또는 자유와 같은 숭고한 가치를 담았다. 때문에 당시 모네의 그림을 본 평론가는 “인상밖에 없다”며 비아냥 섞인 평론을 남겼다. 정말 그 작품에는 숭고한 가치나 서사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아름다운 그 순간만이 담겨있다.
영화는 초반에 이 그림을 2초간 줌인을 하면서 비장한 암시를 남긴다. 제목부터가 <바닐라 스카이>이니 분명한 감독의 의도를 따라 이 그림을 주목해봐야겠다.
"Open your eyes"
소피아의 목소리로 데이빗이 눈을 뜨면 바닐라색 하늘이 펼쳐져 있다. 다정한 아버지, 사랑하던 연인과 성공적인 기업경영,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데이빗의 자각몽은 흘러간다. 자각몽에서 오류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가장 아름다운 하늘색과 함께 달콤한 인생을 즐긴다.
하지만 이내곧 자각몽 오류를 통해 바닐라 스카이의 세상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옥상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씬은 바닐라색 하늘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다. 데이빗의 눈 앞에는 사랑하는 소피아와 낭만적인, 하지만 어쩐지 몽환적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아름답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데이빗은 선택을 해야한다. 아름다운 꿈속에 남을 것인가.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모네의 그림을 아름다운 순간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고 조롱받던 작품은 끝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인상주의’라는 사조를 탄생시켰지만 영화는 다시 한번 이 바닐라 스카이의 한계를 보여준다. 뜨겁게 오르는 노을이 지고나면 다시 차가운 현실을 맞이 해야한다. 데이빗은 사랑하는 소피아의 얼굴과(페넬로페 크루즈가 진짜 너무 아름다움) 바닐라색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옥상에서 뛰어내려 꿈에서 깨어나기를 결정한다.
<바닐라 스카이>는 아름다운 순간을 그린 모네의 그림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현실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독려하는 영화이다. 우리는 먼지 가득한 세상을 살다 주말에 커피와 책으로, 넷플릭스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그 자유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을 느끼고 현실세계가 얼마나 억압된 삶이 었는지를 깨닫는다. “Open your eyes”라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바닐라 스카이처럼 우리는 작품의 세계로 도망간다. 하지만 다시 뛰쳐나와야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데이빗이 “Open your eyes”라는 소피아의 목소리와 함께 눈을 뜨는 것처럼.
어느때 보다 많은 작품을 감상하는 시대이다. “Open your eyes”를 읊으면 열고 닫히는 세상으로 달려가 위로를 받고 삶을 다시 곱씹어본다. 이것이 아름다운 순간을 그렸던 모네의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이고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