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어떻게 깨어지는가
평화는 어떻게 깨어지는가. 매일 아침 공장을 출근해 12시간 주 6일 노동으로 간신히 찾은 집안의 평화를 지키내고 있을 때 아들놈이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할 때 평화는 깨진다. 나는 음악을 하겠다는 말을 퇴근한 엄마에게 냅다 뱉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개구리 소리와 보랏빛 하늘이 머리 위를 감싸고 있다. 버스 정류장까지 40분을 걸어 나가야 하는 이 시골에서 집 밖을 나가면 한없이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집에서 정류장까지의 40분은 조금만 느리게 걸으면 음반 한 장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렇게 들었던 음악이 나를 이토록 무모하게 만들었다. 나는 듣고, 걸었다. 나에게 음악은 공연장에 가서 밴드의 음악을 듣는 것도 연주를 하는 것도 소파에 앉아 음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음악은 걷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늘 어딘가로 걸었다.
내가 음악을 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척없는 일이었는지 독자들에게 설명을 드려야겠다.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악기를 쳤군요? 아니요. 노래를 꽤 잘하시군요? 아니요. 음치예요. 학원을 다녀 본 적 있나요? 아니요. 음악과 관련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나요? 바이엘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누가 해보라고 권한적 있나요? 아니요. 그럼 어떤 음악과 관련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걸으면서 음악을 들었습니다. 연주를 해본 적도 특별히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나는 오직 들었습니다. 음악을 들었습니다.
나는 과감하게 실용음악학원을 끊었다. 학원에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문방구를 향했다. 나는 음악 노트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벅찬 감격의 순간이었다.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늦게 음악을 시작한 사람들이 그렇듯 음악으로 큰돈을 벌 생각은 없다. 그저 나의 모든 하루가 음악이었으면! 나의 사랑도 나의 생계도 나의 모든 시간이 음악이었으면. 음악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 외로워질 수 있다.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있어! 나는 음악 노트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키스가 끝나고 눈을 떴을 때 공책에는 헬로 키티가 보였다. 나는 갸우뚱했다가 이내 영어 공책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든 과정을 문방구 아줌마가 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첼로가 그려진 흰색 음악 노트를 다시 집어 들어 계산을 했다. 나와 음악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빠는 며칠째 베란다에서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리둥절하실 테지. 하지만 나는 물에 빠졌다가 갓 수면 위로 뛰쳐 올라온 인간처럼 필사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음악이 나를 데리고 가는 곳으로 걸을 뿐이다. 그것이 오디세이아를 홀리는 사이렌처럼 사악한 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