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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Jun 01. 2021

빵부스러기 같은 일상, 고귀할 수 있나요?

고귀한 일상 김혜련 2021 서울셀렉션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068587



1. 답답한 일상



말라비틀어진 빵 부스러기 같은 나날들이다. 출구가 없다.

하소연하며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던 친구들도 만나자는 전화가 뜸해졌다.

건강과 생의 활력을 위해 다니던 운동도 강제 종료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삶의 기쁨이기도 했던 많은 모임들이 중단되었다.

가끔씩 기분전환으로 하던 쇼핑도 외식도

더 큰 맘먹고 나서던 화려한 여행도

다 문이 닫혔다.

이 일상이 고귀할 수 있는가?      


고귀한 일상의 저자 김혜련의 언어를 따라가 본다.



2. 앉아라      



신비로운 것,

새로운 것 찾아

끝없이 유랑하는 자여.     

 

앉아라, 그 자리에   / 앉아라  p 39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 주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유랑의 시간을 멈추고 이제

고요의 자리에서 삶을,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전작 <밥하는 시간>에서 ‘내 몸 내 삶이 곧 우주 생명이니 그저 살 것’이라고 했던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정신은 이 책 <고귀한 일상>에도 이어진다. 오래 헤매던 관념의 세계에서 일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의 경험들, 깨달음의 기록이다. 나 자신이 우주 생명이니 고귀하고 그 사소한 삶, 일상이 고귀함을 발견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가 뭔가?”

수십 년 묻고 되물었던 질문에 이제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냥 살아!”라고   /    스토리를 살다  p.25      



3. 생명 그것의 강인성, 명랑성, 그리고 일체성      



생명은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이 있다.  저자는 여름 아닌 초가을에 뿌린 쑥갓이 추운 날씨를 버티고 살아내는데서 발견하는 생명의 강인함을 노래한다.


초가을에 뿌린 상추와 쑥갓이

얼어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 있다.

작고 여린 식물의 강인함에 놀란다.

배 속 단단한 곳에 기쁨이 차오른다.      

‘오, 오 생명의 강인함이여!’ /   가을쑥갓  p. 182     


생명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 방법을 모색한다. 기죽지 않는 명랑한 의지! 위로 크는 여름쑥갓과 달리 햇빛을 많이 받으려 옆으로 옆으로 잎을 넓히는 가을쑥갓의 귀여운 명랑성을 포착한다.


가을채소나 풀들은 여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

햇빛을 가능한 한 많이 받으려고 잎을 크고 넓게 만든다.

여름 쑥갓은 위로 삐죽삐죽 크는데,

가을 쑥갓은 옆으로 자란다.

잎을 넓히고 넓히며.      

살려고 하는 근원적 의지.

생명의 명랑성이다.      


가을 쑥갓을 보며 인간인 나는 각성한다.

기회만 있으면 오그라드는 나,


피해의식과 자기 방어로 졸아든다.      

생명의 명랑성은 어디다 두고!    /    가을쑥갓  p. 183     


자연보다 못하기도 하지. 인간은 기죽고 오그라들고 졸아든다. 쑥갓에게서 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 생명의 강인성, 명랑성을!!

그리고, 생명은 모두 너와 나 없이 하나이다.      


어느 농부가 고결한 물줄기를 돌려 논을 만들고 거기 벼를 심었다. 그 물에 발 담근 벼들. 눈 시린 연둣빛으로 햇살에 헤살거릴 때, 갓 감은 머릿결 여린 바람에 다복이 나부낄 때, 내 몸에도 쩌렁한 물줄기 들어왔다. 정수리가 부르르 떨렸다. 차갑게 날 세운 물이 몸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 나는 나 아닌 것이 되는구나, 이런 자기 초월도 있구나. 희양산 아래 선승 같은 물줄기에 발 담그고 자라는 어린 벼야, 나는 너이고 싶다. 아니, 내가 너다.    / 그 벼가 되고 싶다 p. 29      


논물에 담근 발, 시린 연둣빛 벼, 햇살, 바람이 한데 뒤엉킬 때 쩌렁한 물줄기가 들어온다. 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자연,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나는 너이다.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상태이다. 이 하나 됨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내 안이 연둣빛 되는 일체감, 달빛 속 시공간을 넘는 세계와 하나 되는 신성함으로도 경험된다.


어느 봄날 저녁 가랑비 오시면 고요 속에서 듣게 된다.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소리인 듯 아닌 듯, 들리는 듯 마는 듯, 빗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내 안은 온통 연둣빛 물이 든다. 비에도 젖지 않는 연잎과 비 떨어지는 소리에 젖어드는 나. 두 존재가 어두워지는 고요 속에 마주 보고 있다.   /  고귀한 사치 1 p. 31      


차가운 방 안 가득 넘치는 부드러운 달빛 속

백 년도 못 살 내가,

장구하고 신성한 세계와 하나 되는 순간!   / 순간의 빛 겨울 p. 141      



4. 그냥 사는 영웅적 용기      



무서움과 공포에 떨던 나는 어느 순간 이상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분명 울면서 걷고 있었는데,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르는 내가 있었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겨울밤  p. 63      


저자는 펄펄 열이 나는 동생의 약을 사러 캄캄한 밤중에 혼자 오 리가 넘는 약방을 걸어갈 때 무서워하며 울고 있는 자기 자신 안에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르는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미 근원적으로 있는 생명의 명랑성에 대한 포착이다. 모든 존재가 억압 없을 때 나오는 생명의 근원적 명랑성은 바로 우리 안의 자연이다. 그 생명은 아흔아홉 할머니가 매년 봄 부활하듯 강인하며 자연과 하나로 녹아든다. 그러나 생명의 온갖 선성(善性)을 잊고 지내는 우리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자기의 일을 할 때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몸이 스스로 가진 생명의 기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웅적 용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직한 것은 몸이고 구체적인 일상이다. 내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일상은 나의 구체적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나의 일상, 비근하고 사소한 것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어쩌면 ‘영웅적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너무도 오랜 습관을 마주 봐야 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빛도 안 나고, 돈도 안 되는 일이다. 천 번을 바꾸어도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끈질긴 관성과 마주해야 한다.  / 사소한 것을 고귀하게 하라  p. 72     


영웅적 용기가 필요함은 너무 질긴 관성 때문이며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며 외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기하고 죽고 눈물을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깊은 슬픔을 축하해

포기는 곧 부활이라는 것을

삶을 눈물로 가르치지  /  이혼을 앞둔 벗 나타샤에게 p. 77     


아이러니하게도 그 눈물, 슬픔, 죽음을 뚫고 바로 그 자리에 꽃은 고귀함을 피운다.


네 눈물과 일상의

지리멸렬한 그 자리

거기서 꽃은 핀다  / 앉아라 p. 40      



5. 우리 누추한 자리에 꽃을      



삶의 근원은 우리의 일상 즉 밥 먹고, 놀고, 잠자고, 일하는 것. 모든 존재는 일체이다. 별것 없는 세상. 그래서 그냥 살라고 한다. 사소한 일상을 고귀하게. 영웅적 용기를 가지고.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명랑하게

따뜻하게

동시대 쉬운 언어로 풀어낸 책

청량한 느낌의 책

손에 쥐기 쉬운 상큼한 디자인의 책

질퍽거리는 내 모습으로 다가가 위로받는 책

가벼워지고 환해지는 책

저자의 삶이 글자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책

바쁘게 읽어서는 읽을 수 없는 책

그러나 언어 너머의 진동이 있는 책  

마음을 비워야 보이고 들리는 책

틈틈이 읽고 생각날 때 꺼내 들고 싶은 책      


전작 <밥하는 시간>으로 알게 된 김혜련 씨 와의 느슨한 우정 위에

올해 <고귀한 일상>으로 다시 만나게 된 그의 노래     

그의 노래에 내가 흔들렸다.      


연잎에 내리는 비에 함께 연둣빛 물이 들었고

부활을 위해 포기하는 나타샤의 슬픔에 공감했고

늙은 고양이 오중이의 삶에 존경을 표했고

편의점 청년에게 눈 맞춤을 해주었고  

다양한 몸들의 의젓함과 절실함을 보았다.       


그냥 사는

누추한 우리 삶의 자리에

고귀한 꽃을

피우고 싶다.

영웅적 용기로.


그냥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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