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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May 22. 2022

경계인의 고독과 꿈

세계 초연 폴 치하라 비올라 협주곡 감상  

폴 치하라 비올라 협주곡: 젊은 예술가의 영웅적 초상  

Paul Chihara, Concerto for Viola and Orchestr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Hero       

Moderato cantabile

Risoluto-Andante cantabile-Allegro molto

Intermezzo(Andante)

Allegro furioso-Allegrando espressivo      


아...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이라니....      


세계 초연이라는 폴 치하라의 비올라 협주곡을 듣고, 계속 맴도는 생각이었다. 주제 선율처럼 반복해서 간간이 들리는 아주 짧은 아리랑 선율은 심장보다 더 깊은 곳에 와닿는 기분이었다.      


이 곡은 오로지 용재 오닐을 위한 비올라 협주곡이다. 작곡 배경이 특이하다. 아시아 이민자의 후손이라는 공통적인 성장 배경을 가진 리처드 용재 오닐과 작곡가 폴 치하라(일본계 미국인)의 인연은 40대와 80대라는 세대를 초월하여 이어졌다. 그들은 사회에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경계인의 고독과 연민을 공유했고 폴 치하라는 용재 오닐의 삶을 그린 비올라 협주곡을 작곡했다. 마침내 2022년 5월 20일에 한국 롯데콘서트홀에서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로 서울시향이 세계 최초로 연주했다.    

  

몸으로 악기로 영혼으로 노래하는 춤추는 연주자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은 자주 관객과 교감하며 그 특유의 흐느적 거림으로 춤사위를 넣는다. 앞 관중뿐 아니라 옆의 저 높은 곳에 앉은 사람에게 까지 시선을 향한다. 익숙하지 않은 연주 자세, 마치 아이가 놀이에 취해 있는 것 같다.  세계 초연의 공연이고 선율은 낯설다. 미국의 이민자 (미국으로 입양된 전쟁고아)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내면의 소리를 협주곡은 놓치지 않고 포착해주는 듯하다. 다양한 타악기에는 징까지 포함되었고, 팀파니, 큰북, 작은북, 마림바까지 참으로 다양한 악기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다양한 악기는 마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다양성 속에서의 이민자의 혼란을 이야기하듯 하다.


 

용재오닐의 연주모습- 다양한 타악기(그중에 징도 보인다)-서울시향


작곡가의 설명에 따르면 1악장의 고독과 갈망, 2악장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3악장의 안식으로 구성된다.

특히 2악장에서 불쑥 들리는 아리랑의 테마 선율. 아... 이상하다. 아리랑 몇 음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다.

그러다 3악장에 로큰롤의 경쾌한 춤곡과 함께 곡은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내가 위대한 아티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을 그린 음악적 초상화이다.
이 곡은 매우 높은 음역대에서 고독하면서도 소박하게 시작하며, 그 선율은 마음 아린 고독과 개인적인 갈망을 노래한다. 이 주 선율은 단순한 노래로 발전해 -마치 어둠 속에 부는 휘파람처럼 -침묵과 고통을 물리치며 위안을 찾는다.  
제2악장은 갑자기 마치 끔찍한 전쟁의 한가운데 있는 양, 폭력적이면서도 정당한 이유가 없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이 혼란스럽고 고통으로 가득한 소리의 세계는 차츰 오프닝 선율로 전환되고, 이는 오케스트라 전체에 의해 한국 전통 민요 선율로 변형되어 연주된다.
제3악장은 대단히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마치 폭풍의 눈에서 기도하듯, 고요한 안식의 순간이다.  
피날레는 열정적인 민속 음악의 에너지와 로큰롤의 유머로 가득 찬 거침없는 춤곡으로, 기쁨과 감정의 위안을 선사하다. 협주곡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소환된 제1악장의 오프닝 선율은 이 순간 외로움을 덜고 한층 더 낭만적으로 탈바꿈하고, 이를 수용하며 평화와 안식을 찾는다.

- 폴 치하라 작곡가 / 번역 노승림 -      


연주가 끝나고 용재 오닐 씨는 관중석에 참석한 작곡가를 무대 위로 초청한다. 음악보다 더한 감동이 있었다. 연령의 차를 초월하여, 경계인으로 살아간 두 사람의 우정은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작곡가는 40세나 어린 연주자의 삶을 보며 오직 그만을 위한 음악을 선사했다. 어쩌면 마지막 혼을 불태워 곡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는 그 연주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연주자는 친구가 자신에게 선사한 곡을 연주하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건 그저 악기가 내는 소리만이 아니고 그들의 영혼, 그들의 삶 전부가 아니었을까?     


  

작곡자가 무대위에서 함께 인사- 연주한 단원들을 향한 감사


앙코르 곡은 섬집 아기


Sonnet Ensemble with Richard O'Neill / 섬집아기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눈감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격한 관객의 앙코르 요청에 용재 오닐 씨가 선택한 앙코르곡은 그의 대표곡 섬집아기이다. 구슬픈 노래에 아주 잘 어울리는 비올라 선율이다. 용재 오닐의 연주이기에 그 감흥이 남다르다.   

아기를 혼자 남겨두고 생계를 위해 굴을 따러 가야 하는 엄마의 처절한 마음

전쟁고아로 미국에 입양되어 이민자로 살아가야 했던 연주자의 엄마의 마음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의 엄마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져 그는 양할머니에게 키워졌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따스한 엄마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을 때 아이의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

그것은 연주자의 내밀한 이해할 수 없는 흔들림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바다가 있었다.

슬픈 엄마도, 무기력한 아이도 어쩔 수 없는 그 시간에도 그들을 품는 바다가 있었다.      


연주자의 연주가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그가 실제로 섬집아기이기 때문이다.

용재 오닐을 위해 곡을 선사한 작곡가 폴 치하라도 섬집 아기였다.      

듣는 관객인 우리도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섬집아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율에

함께 아프고

함께 위안을 받았다.      


음악은 삶이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내가 세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이에요.
예술이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은 삶과 통합되어 있을 때 아닌가요?
나는 음악이 그 자체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재 오닐-    




이전에 예약을 해두었던 공연이었는데, 마침 임박해서 개인적으로 너무 바쁜 상황이라 공연을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늦게 도착했지만, 첫곡만 놓치고, 다행히 용재 오닐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몸이 부스러지듯 피곤한데, 음악의 치유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싶게 만듭니다.


용재 오닐의 재발견. 아.. 이 사람! 너무 멋있다!  피곤한 몸이라 더더욱 집에 돌아와서도 용재 오닐의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용재오닐씨! 삶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하네요. 감사합니다.


음악이 삶이라는 그의 말은 여러 가지 자료에서도 확인됩니다. 기회 될 때 용재 오닐의 음악으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도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눈감고 스르르 잠이 들까 합니다.  


* 공연 후 인사하는 장면 외의 공연 중 사진 출처는 서울필 인스타입니다.

* 관련기사 조선일보(김성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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