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유학까지 와서 대학을 졸업한 후 바라던 직장을 갖게 된 딸을 위해 부산에 계시던 부모님은 열일 제쳐두고 서울로 이사를 오셨다. 오로지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당신들의 고향을 등지고 먼 곳으로의 이사를 결심하셨다. 어린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희생인지 제대로 헤아리지도 못했다. 내 일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이다. 평일에 근무를 하고 주말에는 다른 약속이나 일정으로 쉴 틈 없이 바쁜 내게 어느 날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루도 빠끔한 날이 없네”
경상도 사투리로 ‘하루도 빈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구나’라는 의미였다. 평소 나에게 잔소리라고는 않는 엄마였는데 그런 말씀이 상당히 생경하여 꽤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엄마의 섭섭함을 에둘러 표현하셨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 깊은 속뜻을 헤아려보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딸을 위해 당신의 거처를 옮기는 결단을 하시고 서울까지 오셨다. 당연히 자랑스러운 딸의 뒷바라지를 하며 쉬는 날이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잠시 멈추어 섭섭한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기에 내가 너무 철부지였고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세월은 흘러 그 엄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내가 얼추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 아이들은 그 당시의 내 나이가 되었다. 그들은 장성하여 각자 자신의 공부를 혹은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제는 내가 해바라기가 되었다. "애들아! 같이 밥 먹자. 애들아! 엄마랑 데이트 하자." 바빠지는 일 때문에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거처를 그들의 일터 가까운 곳으로 옮기면서 점점 집을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제는 집에 한번 오라는 말도 하기가 미안해진다. "바쁜데 시간 될 때 오렴...." 늘 하는 말속에 강한 그리움은 묻어둔다. 고작 명절이나 특별한 기념일 정도에만 얼굴을 볼 정도이다. 저러다 결혼이라도 하여 완전 독립을 해 버리면 더더욱 얼굴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는 온갖 정성으로 자식 교육에, 뒷바라지에 신경을 쓰지만 그 자식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딸은 친구가 된다 하는 말에 한가닥 위로를 얻으며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엄마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들보다는 딸에게 의논하고 친구처럼 그렇게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 모든 딸들이 그러하듯 나의 딸들도 얼마나 자상하고 헌신적인지 모른다.
그런데 가끔 딸아이를 결혼시킨 친구들에게서 듣는 말 중에 섭섭하다는 표현이 있다. 왜일까? 각자의 입장이 다르다. 딸에게 엄마란? 엄마에게 딸이란?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듯이 그 정도는 다른 것 같다. 내가 나의 엄마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아 “하루도 빠끔한 날이 없네”라는 말씀을 하시던 엄마와 나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나보다 훌륭한 나의 딸들이지만 엄마가 바라는 딸과 딸 스스로가 생각하는 딸의 역할에는 간격이 있음에 틀림없다.
“난 자식이 커서 결혼을 하면 가족이 많아지고 내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실상 자식이 결혼하니 떠나보내는 거더라. 처음에 그게 잘 안되어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나도 그런 것 같다. 결국 자식은 내 품에 두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낸다는 말이 맞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일단 독립을 해서 나가면 더 이상 이전의 내 품의 자식이 아닌 게 맞다. 마음으로 떠나보내지 않은 부모에게 우리 집은 떠난 자식에게는 부모님 댁이 된다. 그들은 분리되려고 하는데 부모는 떼어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떠나보내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고 인정하기 싫다. 자식이 내게 어떤 존재인데 그들을 떠나보내다니.... 자식이 크면 독립시키는 건 당연하다고 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아이들을 놓지 못하는 부모들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 자식이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부모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 이래라저래라 참견하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된다. 자식은 그 말이 싫고 엄마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게 된다. 끊임없이 엇갈리는 엄마와 딸의 관계.... 내가 나의 부모 마음을 몰랐듯 나의 아이도 알 수가 없나 보다..
딸과 엄마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각자 살아온 삶의 배경, 세대에 따른 문화의 차이가 크고 견해의 차이로 인해 공감대가 좁다. 해서 딸이 생각하는 친구와 엄마가 생각하는 친구는 같을 수가 없다. 다른 게 당연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기대하는 친구관계를 바라지 않기로 한다. 딸이 허용하는 범위에서의 친구에 만족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서 딸의 입장에 맞추기로 했다. 마음으로 붙들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보다 그저 떠나도록 허락하는 것, 그저 딸아이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나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내 입장에서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순리인 것 같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아직 쉽지 않다.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는 영원히 자식에게 해바라기 인지 모르겠습니다. 친구 같은 자식을 바란다는 건 내 욕심이라는 걸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배우는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해바라기가 늘 해를 향하듯 자식이 장성한 어른이 되어도 부모의 가슴은 늘 자식을 향하고 있을 겁니다. 해바라기가 좀 더 씩씩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떠나보내는 아픔을 생각하며 나와 같은 해바라기들의 생존법을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