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보아온 가장 예쁜 얼굴의 너
기분 좋은 변신을 보여준 두 친구를 소개한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 A는 이전보다 훨씬 날씬하고 오랜 세월이 무색하게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막역하다기에는 너무 긴 공백 탓에 내심 '친구가 관리를 잘하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나팔을 불어댔다.
“요즘은 일을 하려면 얼굴이 늙어 보이는 걸 사람들이 싫어해. 고객관리 차원에서 주름을 없애기 위한 안면거상을 했어. 먼저 이야기하는 건데 쌍수도 했어. 몇 년 지나니 지금은 다 쳐져버려 표시가 잘 안 나지만.”
친구는 활짝 웃으며 아무 스스럼없이 성형고백을 했다. 학창 시절의 A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행보여서 내심 놀랬다.
“너마저 얼굴에 손을 대는구나. 나만 안 한 거 아니야? ”
지금은 아주 보편화된 현상이지만 적어도 우리(?) 세대 내 주변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라 저으기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얼굴에 인위적인 손을 대지 않은 이유가 내 외모에 자신이 있어서는 물론 아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라며 얼굴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고집스러운 신념을 유산처럼 가져온 데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어쭙잖은 신념으로 포장한 내 게으름이 진짜 이유다. 여하튼 성형공화국에서 나는 천연기념물에 해당한다.
요즘 들어 더더욱 거울을 보기 싫어지고 하루가 다르게 흰머리는 늘어나고 주름도 깊어가고 눈도 작아지는 것 같고 불어나는 체중은 넓어지는 얼굴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다. 전형적인 중노년의 모습으로 더 이상 개성 따위 저리 가라 하며 점점 고만고만한 내 나이 또래 모습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사람을 만나려니 예의상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옷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단정하고 트렌디한 것으로 사입을 수 있지만 문제는 얼굴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년을 마스크를 쓰고 다닌 탓에 내 얼굴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스크 위에 살짝 비치는 눈만 어찌 외면하면 내 얼굴의 실체는 철저히 가려졌으므로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고민을 표면화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A가 내 고민을 들추어내고 말았다.
“아! 내가 너무 게으르구나. 외모 관리를 위해 신경을 써야겠어.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체중은 늘어가고 얼굴은 점점 노인네가 다 되어 가고 있어. 보톡스라도 맞을까? 자꾸 처지며 작아지는 눈을 커 보이게 하기 위해 나도 쌍수를 해야 할까? 만날 때마다 쌍수하겠다는 친구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정말 그 친구 따라 강남을 가볼까?"
작년 유독 흰머리가 많이 생겼다. 남편은 5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해서 염색을 하며 흰머리를 가리더니 이제는 아예 백발이어 염색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억울하게 단지 머리카락의 색깔 때문에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반면에 나는 흰머리가 거의 없어 염색 걱정을 하지 않고 있어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만 앞머리 쪽으로 하얗게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다. 처음에는 새치를 가리는 라00이라는 제품을 사서 조금씩 발라보긴 했는데 내 급한 성미에 외출 전에 그걸 바르고 있는 것이 영 성가셔 결국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는 흰머리가 멋진 모 전장관, 탐스런 백발을 자랑하는 멋진 배우들을 보며 나도 절대 염색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염색약이 시력에도 좋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점점 그 귀한 머리카락은 빠지고 다시 날 생각은 않고 그나마 매달려 있는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가는데 총체적으로 점점 몰골이 말이 아닌데 과연 내가 뭘 믿고 초라해져 가는 모습을 견딜 수 있을까? 나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다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나 혼자 독야청청하며 잘난 척한 것 같아 머쓱해진다. 각설하고 한 친구의 변신을 만난 것에 이어 또 다른 변신을 소개하고자 한다.
B는 모범생에 열정이 가득하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며 연구하며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영락없는 교육가, 학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그의 활동의 폭은 대부분 학교 언저리다. 언제나 반듯하고 책임감으로 무장되어 있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타인에게 정성을 다하는 친구이다. 옷은 거의 무채색이고 옷의 스타일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거의 예외 없이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는 그의 규칙성은 그의 장점이다. 만나서 이야기할 때의 표정도 항상 그만의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어 그를 만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게 사실이다. 그런 그가 변했다.
쌍수를 한 것도 아니고 보톡스를 맞은 것도 아니다. 며칠 전에 만났는데 동네꼬마들 스케이트장에 갈 때 주로 쓰는 털모자를 눌러썼을 뿐이다. 복장은 보통때와 다르지 않다. 피부도 뽀얗고 눈도 커진 것 같다. 그러니까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다. 홍합밥정식으로 점심을 거나하게 잘 먹어서인가? 방학을 해서 바쁜 일과로부터 놓여난 자유로움 때문인가?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와서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지금까지 널 본 중 가장 예뻤어. 개구쟁이 같았어."
"내가 나를 배려하려 하고 있어. 해마다 오는 내가 속한 모임의 행사에 나는 늘 최선을 다해 일했어. 이번엔 하기 싫었어. 그래서 참석하지 않겠다 하고 친구와 놀았어. 좋더라! "하며 씩 웃는 그의 얼굴에서 개구쟁이가 보였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순간 눌러쓴 모자 사이로 반듯하지 않게 삐죽 삐져나온 머리카락사이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명랑성을 보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였다. 타인의 요구를 들어주며 정작 자신을 소홀히 했던 시간에 대한 반성이었다. 자기를 대접하니 그리 명랑하고 그리 개구쟁이 같은 생명력이 드러난 것이었다.
잘했어 잘했어. 이젠 자신을 배려하며 살자. 너무 오래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어.
두 가지 변신 이야기를 해보았다. 공교롭게도 요 며칠 사이에 경험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며칠 전에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당신의 모습 중 가장 안 이뻤어"라는 말을 들었다. 외모의 변신이든, 내면의 변신이든 변신으로 예뻐진 친구들과 달리 나는 가장 안 이쁘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과격하게 이야기한다면 폭삭 늙어 보인다는 말이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겠고 그런 말을 들은 나와 상반되는 두 친구의 모습이 더욱 도드라져 보여 이런 글을 쓰고 있나 보다.
어느 쪽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배려하여 내면을 변화시키든 필요에 의해 얼굴을 조금 변화시키든 두 친구는 자기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다 보기 좋았다. 나를 배려함으로 건강한 에너지가 밖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배웠다. 필요하다면 의술의 힘을 빌어 좀 더 건강한 모습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배웠다. 그 무엇이든 자기를 사랑하며 변화를 감행하는 것은 진정 살아있음의 표현이니까 말이다.
가장 이쁘지 않았다는 말, 폭삭 늙어 보인다는 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너무 힘겨운 나날들이어 몸과 마음이 다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전날 잠을 못 자고 밤을 꼴딱 새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도 하다. 많이 자고 푹 쉬고 나니 얼굴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생명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회복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내 삶에 가장 젊은 날인 오늘 가장 이쁜 얼굴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게 된다. 나이 5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얼굴이 곧 그 사람 자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얼굴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당신 얼굴은 안녕하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