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헤어 컷
별안간 얼굴이 중대 관심사가 되는 요즘이다. 단순한 미적 관점이라기보다 최소한의 예의 차원에서 또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의 차원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다. 노년의 주름이 아름답다고는 한다. 그래도 난 솔직히 주름 진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하기 위해 차원 상승이 필요한 하수이다. 어떻게든 감추고 싶고 아직은 젊음을 향유하고 싶다. 최후의 발악이다. 그러던 차에 내 외모의 일부인 거의 변하지 않는 헤어스타일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머리 잘라 줄까?”
미술을 전공한 한 친구는 손재주가 남다르다.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든다. 직접 타일에 물감을 칠하고 구워 내게 선물을 하기도 하고 겨울이면 이것저것 털실로 뜨개질을 하여 목도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로서는 경탄이 나올 지경이다. 유독 자신의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많고 지금도 좀처럼 소화하기 힘든 커트머리를 유지하는데 그에게는 잘 어울리며 세련미가 풀풀 난다. 과거의 사진을 보면 한 미모 했던 친구다. 지금은 동네 아줌마라 과거의 영광은 다 사라졌다고 스스로 한탄하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여전히 매력이 있다.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헤어기술일 텐데 영상에서 보았다며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언젠가 내가 그의 미용기술 마루타가 된 적이 있다. 뭐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미장원 가서 가다듬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내 머리를 그의 가위에 맡겼다. 처음 해보는 커트인데 제법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다.
그러던 친구가 요즘 가뜩이나 축 늘어져 있는 내 머리가 한심했는지 직접 머리를 손봐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이런 건 덥석 물어야 해. "좋아 언제든. 언제 만날까?"
그렇게 해서 어느 날 친구는 미용가위를 가지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슈퍼맨처럼 황금 보자기를 둘러쓰고 의자에 앉았다. 미용실에 가서 보자기를 둘러쓰면 꾹꾹 페달을 밟아 의자가 위로 솟구치는데 집에서는 그 장치가 없어서 아쉽다. 왜 그런지 보자기를 둘러쓰니 아... 보자기를 펄럭이며 슈퍼맨이 되고 싶어 진다. 막 장난이 치고 싶어 진다. 집에서 직업 미용인 아닌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다니 스릴이 넘친다.
"어느 정도 잘라줄까?"
"음..."
사실 난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어떻게 좀 알아서 해줘 하는 심정이다. 머뭇거리니 친구가 방향을 잡아준다.
"단발정도로 자르고 머리는 묶을 수 있을 정도면 좋겠지?"
"음 좋아. "
"알았어." 하더니 서슴없이 서걱하는 가위질 소리와 함께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내 머리를 벗어나 화장대 위에 놓인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뭔가 내 중요한 부분이 잘려 나가는 것 같다. 머리가 잘리고 힘을 잃은 삼손도 아닌데 말이다. 속도가 붙어 더더욱 서슴없이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만큼 심장은 쿵쾅거린다. 나도 모르게 '어머'하는 탄식 아닌 신음소리가 나온다.
"왜? 불안해?"
"... 아니... "
차마 불안하다는 말은 못 했지만 정작 잘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뭔가 불안했다. 이러다 이상해지면 어떡하지?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는 내게. 몇 번 가위질하더니 다 끝났나 보다.
"옆머리를 기르고 뒤를 짧게 해서 보브스타일로 하면 훨씬 젊어 보일 것 같아. 아직은 옆머리 층이 져서 짧으니까 좀 길러봐. 그리고 펌 할 때 뒤를 쳐달라고 하면 스타일이 달라 보일 것 같은데 어때?"
역시 헤어에 별 관심이 없는 나와 다른 별종別種은 보는 눈이 다르다. 생각해 보니 분위기가 한참 달라 보일 것 같다. 다음 미용실에 갈 때는 내가 미용사에게 주문할 스타일이 대충 눈에 그려졌다. 친구가 내 머리를 자르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 네 번 정도 가위질을 했는데 머리가 짧아지니 짧아진 길이만큼 마음도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살짝 좌우 길이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이건 나중에 미용실에 가서 조금 다듬으면 된다. 자른 머리카락을 얼른 치우고 친구와 함께 산책길에 나섰다. 발걸음도 경쾌하게!
내 머리를 경쾌하게 해 준 친구가 대뜸,
"그런데 말이야 난 요즘 옷이나 이런 것에 신경 안 쓰니 너무 편해. 이전에는 뭐 다닐 때도 많고 해서 옷차림 같은 것에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요즘은 뭐 다닐 때도 별로 없어 옷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돈도 절약되고 아주 좋아. "
그러고 보니 이전의 매력과는 다른 이미지로 점점 변하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금의 수수함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지나가다 한껏 꾸민 사람을 보면 나도 저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
꾸미지 않겠다는 말인가? 꾸미겠다는 말인가? 친구의 속마음이 헷갈리는 가운데 내 생각을 꿋꿋이 이야기했다.
"편하게 지내는 거 좋지. 그러다 그냥 할머니 되는 거야. 꾸밀 수 있을 때 꾸미는 게 좋은 것 같아. 전철을 타도 왠지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 옆에 앉고 싶어 져. 뭘 배워도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이 가르쳐주는 게 좋아. 왠지 알아? 단정한 차림, 성의를 다한 차림에서는 뭔가 건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아. 나는 젊고 단정한 사람을 선호하면서 외모에 대한 나의 편함을 다른 사람이 이해해 달라는 건 좀 이기적인 거 아닌가? 그러니까 나도 가꾸어야 할 것 같아. "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살짝 내린 눈이 얼어 군데군데 미끄러운 산책길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햇살 때문인지 외모에 관한 우리의 뜨거운 이야기 때문인지.
이건 안 비밀.
친구랑 걸으며 날씨 좋아지면 성형외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자고 했다. 눈이 축축 처져 불편하기도 하고 보기에도 이쁘지 않은 얼굴에 대한 고민이 통하는 나이의 삶은 이런 모습이다.
내면의 중요성 운운하면서 어찌 보면 외모를 등한시하며 살아온 오랜 세월이다.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는 요즘 나도 한번 꾸며보고 싶어졌다. 외모를 가꾸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 나이의 힘이다. 여하튼 가능하다면 변신은 무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