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헤르만헤세. 민음사 2012
청소년 권장도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헤르만 헤세의 책 『데미안』은 청소년 시절에 읽다 그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부딪혀 끝까지 읽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그 유명한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는 구절에 꽂혀 알을 깨고 나오는 신비한 새의 모습을 상상하긴 했다.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읽힐 만한 <데미안>이 세월을 한참 돌아 뉘엿뉘엿 석양이 지는 나이의 사람에게는 어떻게 읽힐까? 다시 집어든 책의 첫 구절에서 내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청소년시절에는 뭘 감흥 없이 지나쳤을 문구였을 것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바로 나의 고백을 저자는 싱클레어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런!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시대, 지역, 연령 불문하고 공통적인 것이 분명히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내가 내내 중얼거리던 마음이 대저자 헤세의 언어로 툭 모양을 드러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사람은 다 달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그 무엇에서 만나게 되나 보다' 하는 무릎을 치는 통찰이 온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산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나답게 살기와 통한다. 그런데...
삶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가득했다. 『데미안』이 쓰이던 그 시대도 그러했고 그 이후로도 그랬고 21세기 지금도 그러하다. 등장인물 씽클레어가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고백했듯이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을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무엇에 홀린 듯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문득 급브레이크를 밟는 순간이 온다. 그때 비로소 아픈 질문 앞에 선다. 나는 누구? 나는 여기 왜?
1차 세계 대전 후의 혼란기에 데미안은 당시 사람들 내면의 깊은 갈망을 건드렸고 시대의 아픔을 고발하는 여러 가지 작품으로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럴만하다. 안전한 세계와 금기시되는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씽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성장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의 이야기! 총알 하나로 무의미하게 사라질 수 있는 가벼운 목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던 당시 사람들은 진정한 삶에 대한 깊고도 아픈 질문 앞에 서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2012
서두에서 밝히는 저자의 이 고백은 소설 『데미안』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으로 보인다.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이 작품은 커다란 도전이다. 1차 세계대전 못지않게 21세기는 다른 양상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소리 없는 총알에 우리는 얼마나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가? 죽어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이다.
개그맨 고명환 씨의 인터뷰를 글로 접한 적이 있다. 한창 잘 나가는 공영방송의 개그맨이었던 그가 교통사고로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다. 언제 심장이 터질지 모르니 신변정리를 하라는 말을 들었던 그가 죽음 가까이에서 생각해 낸 장면은 화려한 순간들이 아닌 4개월간 재수생 시절 즉 100% 자신의 의지로 살았던 순간이라고 한다. 34년을 살면서 자신의 의지로 산 순간이 4개월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극적으로 살아난 그의 삶은 180도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의 많은 성공 이야기 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자기 의지로 살았는가? 어쩌면 그의 질문은 씽클레어의 질문과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질문과 맥을 달리 하지 않는 것 같다.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데미안. 헤르만헤세
삶의 모델로 의지하던 데미안이 떠났지만 씽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의 갈등을 지나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사건 중심의 회화적인 소설이 아니라 많은 상징을 내포한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소설이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며 존재와 존재의 하나 됨을 경험한다. 단조로운 서술을 따라다가 이렇게 감동을 받기는 오랜만이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을 외면한다면 계절이 바뀌어도, 세월이 흘러도, 제국을 형성해도, 피라미드를 쌓아도, 깊이 동굴을 판다 해도 죽음 앞에서 떠올릴 아무 가치 없는 일이 되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계대전이라는 백척간두의 현실에서 쏟아낸 당시의 서방 어느 나라의 언어가 지금 이 시대에도 묵직하게 울림을 준다.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 씽클레어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며 책을 덮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
그것을 나도 살아보려 해
그래 무지 어려워
그래도 살아보려고 해
나는 그래서 매일 여행을 떠나지
이 글은 <미디어 여행 오피니언>에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