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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Sep 06. 2021

두 가지 부끄러움

나는 무엇이 부끄러울까?

          

나는 자주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으려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유독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얼굴이 잘 빨개져서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또 부끄러워지곤 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앞에 나가서 발표하는 것, 일어나서 책을 읽는 것들이 싫었다. 이 부끄러움을 이겨내려고 대학 때 연극동아리에 들어가서 연극 활동을 하며 사람들 앞에 서는 공포를 덜어내려 했다. 잠시는 통했으나 부끄러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 부끄러운 것일까?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없는 부끄러움은 아이들이 대상을 인식하고 대상의 반응을 접하면서 생기기 시작한다. 물론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타인의 반응에 따라 자존감이 높은 자로, 혹은 낮은 자로 자라게 된다. 어린 시절에 무대를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던 나의 기질이 왜 점점 자라면서 수그러들고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로 변했을까?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수업 시간에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렸나 보다. 따로 그 무서운 교무실에 불려 가 무릎을 꿇고 벌을 받은 적이 있다. 대체로 모범생에 속했던 내가 개인적인 이유로 벌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때의 감정은 아주 강하게 남아있다. 수치심. 선생님의 기준을 어긴 나는 친구들 앞에서 그야말로 창피를 당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서 그런 사례가 너무 흔하긴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의 그 선생님의 수업 시간은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나는 아마 꽁꽁 입을 닫고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보냈을 것이다.     



■ 가짜 부끄러움     



정신분석 용어 사전에 따르면 “수치심은 거부되고, 조롱당하고, 노출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정서를 가리키는 용어로써, 여기에는 당혹스러움, 굴욕감, 치욕, 불명예 등이 포함된다. 수치심의 발생에는 초기에 누군가에게 보이고, 노출되고, 경멸받는 경험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거절받고, 존중받지 못하고, 경멸받는 경험들이 부끄러움에 관여되어있고,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자는 이후의 행동에 있어 거절받지 않기 위한, 경멸당하지 않기 위한, 존중받기 위한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타자의 행동에 대한 반응 행동은 더는 자기다움의 행동이 될 수 없다. 그 타자는 누구인가? 가족, 학교, 사회, 집단,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오랜 시간 지배해온 가치관, 관념들이다. 그 타자의 기대에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쉽지 않다. 타자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워진다. 다시 말해 타자의 기준에 맞지 않음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타인의 기준은 좋은 학교, 높은 보수, 좋은 집, 좋은 차, 훌륭한 외모 등이 될 것이고, 계급사회라면 가장 높은 계급일수록 바람직한 기준이 될 것이고, 각 사회가 권장하는 인물상도 있을 것이다.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포장을 하지만, 사람들의 면면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사실 이 기준에 맞추려 부단히 애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벗어나려 애썼던 불치병 같은 그 부끄러움은 타인의 기준에 맞지 않음에서 오는 부끄러움이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부끄러움 즉, 가짜 부끄러움이다.     



집을 살 기회를 놓치고 시간만 보내고 있어 여전히 전세살이 하고 있어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멋진 외모가 아니어도, 내세울 직업이 없어도, 통장에 잔고가 많지 않아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남들처럼, 남들처럼,, 하는 그 많은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무슨 연유에서든 많은 사람이 원하는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부러움을 받지 못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어이없게도 쓸데없는 일에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 진짜 부끄러움     



타인이 만들어놓은 기준 앞에 부끄러운 것이 가짜 부끄러움이라면, 진짜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당연히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나답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신기하게도 배우지 않았는데도 진짜 나와 일치되지 않는 일을 할 때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양심에 찔리거나 하는 본능적인 신호가 온다. 이 신호를 자주 외면하고 타인의 기준을 따르는데 익숙하다 보니 이 신호에 무감각해져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 신호를 알아차리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진짜 부끄러움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서시>     



하늘을 우러러,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의 그 고뇌를 생각해본다. 나답게 살지 못할 때 느끼는 진짜 부끄러움을 회복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부끄러움 앞에 괴로워하고 싶다.           




* 이 글은 <글로 모인 사이>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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