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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Sep 04. 2021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용기


 사람을 찾습니다    



 내가 가진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은 4살 때쯤 흑백 가족사진이다. 엄마, 아빠를 뒷배경으로 하고 여자아이 한복을 입었으나 중성적 기운으로 가득 찬 기분 좋은 사진이다. 탱탱한 볼과 꼭 다문 입, 그리고 총총 빛나는 눈은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게 없는 당당한 생기를 머금고 있다. 위로는 오빠, 아래로 동생과 함께 자랐던 나는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이 러닝 한 장 차림에 물총 싸움할 때 같이 뛰어다니며 물총 싸움을 했고, 시키지도 않는데 많은 사람 앞 무대 위에 올라가 스스럼없이 노래를 불러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의 내가 낯설다. 이런 모습의 내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라졌다. 사람을 찾습니다. 나를 찾습니다.           

 

순한 양이 되어      



‘여자가, 계집아이가’라는 단서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더 이상 물총 싸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는 때의 학교 교육을 받으며 국가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지식을 습득했다. 대학 시절 “왜 사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의 시기에 갖게 된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나의 욕구와 자주 충돌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서른을 넘기지 않으려 남들 다 하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결혼, 그와 더불어 시작된 타인의 세계(시댁)에서의 낯선 삶에서도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엄마라는 의무들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뾰족한 돌이 둥근돌이 되는 것. 구별 없이 모두 같아 보이는 기능인으로 변해가는 슬픈 과정이었다. 마치 동물학교에서 독수리, 오리, 토끼가 같은 기준을 향해 자신을 훈련하다 결국 자기다움을 잃어버리는 불행 앞에 서는 것처럼 말이다.      

 

 

순한 양은 사실은 죽어가고 있었다. 사라진 내 모습을 딛고 생겨난 다양한 얼굴들. 그것에 매몰되어 ‘소외’를 겪고 있었다. 다양한 사회적 역할로서의 페르소나(가면)가 원래의 나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페르소나의 팽창. 나는 몸이 아팠고, 마음이 아팠다. 원망하고 싶은 그 화살을 밖으로 향할 수 없어 내가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가면을 벗는 용기     



“들꿩은 열 걸음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   - 장자, <낭송 장자> p. 100- 101 -      

 

  나의 가장 큰 가면은 ‘여자’라는 가면이었다. 사회적 관념에 따른 여성의 역할에 머물고 있었던 나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 독립적인 능력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었다. 스스로 먹이를 찾는 대신 주는 먹이를 먹고사는 안정됨에 길든 새장 속의 새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떤 결정 앞에서 타인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익숙했다. 부모에게 물었고 선생님에게 물었고 종교지도자에게 물었고 남편에게 물었고 친구에게 자식에게 물었다. “이래도 될까요?”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얼마 전에 남편한테 한 말이다. 중요한 결정을 자신이 하고 내게 통보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내가 내뱉은 말이다. 평소에 하지 못하던 한마디가 저 깊은 속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한마디를 내뱉는 것처럼. 시원했다. 대신, 때로는 그 시원함 뒤에는 역풍이 분다. 가면 뒤에 숨어서 누린 안락함을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가면을 쓰는 용기     


 

그렇다면, 역할 따위 다 무시하고 내 본성만 주장하며 산다는 말인가?

아니다. 내 진짜 얼굴을 보고 나면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내 역할에 대한 자세가 달라진다. 내게 맞는 가면을 선택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가면을 버릴 수도 있고, 혹 부득이한 가면이라면 그 가면을 쓰고서도 진짜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기억하고 사람들이 아는 나 

날 토로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나 

Dear myself 넌 절대로 너의 온도를 잃지 마! 

내가 되고 싶은 나, 사람들이 원하는 나 

네가 사랑하는 나, 또 내가 빚어내는 나 

웃고 있는 아, 가끔은 울고 있는 나 

지금도 매분 매 순간 살아 숨 쉬는 

Persona  - BTS, Persona- 


 세계적인 가수로서의 다양한 모습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를 하는 가운데, 사람에게 보이는 자신(페르소나)과 그 안의 자신(진짜 자기)을 구별 짓고 함께 안고 가는 성찰이 놀랍다. “Dear myself 넌 너의 온도를 잃지 마”가면을 쓰고 살아가되 진짜 자기를 지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내가 아닌 가면을 벗는 용기

살아가면서 써야 하는 가면을 쓰는 용기 

그리고 

가면을 벗고 쓰는 가운데 

진짜 자기의 온도를 잃지 않는 

주인으로서의 용기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참되다.  -임제록-     



* 이 글은 <글로 모인 사이>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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