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모다 Sep 03. 2021

나는 우주 생명. 그냥 살면 된다.

밥하는 시간 / 김혜련 / 2020 서울셀렉션


다양한 이유 때문이겠지. 잠이 안 온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먹어 봐도 누워서 유튜브 방송을 이것저것 들어봐도 별 효과가 없다. 결국 자리를 떨치고 책상에 앉아 읽다만 김혜련의 <밥 는 시간>을 펴 들고 내친김에 후루룩 끝까지 읽었다.  제목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책이다. 다행히 약간의 피곤함이 몰려온다. 잠을 잘 수도 있겠다. 얼마 전부터 글쓰기를 실천하는 과정이어서 읽은 지금의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귀찮다는 유혹을 이기고 노트북을 연다.  중간중간은 건너뛰기를 하여 빨리 끝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흐르는 큰 줄기 느낌을  알고 싶었다. 성급함 때문인지 내 깊은 곳의 감정은 잘 길어 올려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몸에 물이 도는 것 같다. 눈가에 그리고 가슴 언저리에. 작가 김혜련의 삶이 나와는 분명 다른데 닮아 있다.      


1. 자기 소외의 삶을 인식하다      


더 이상 달려갈 미래가, 성취해야 할 삶의 목표가 사라진 사십 대 중반,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전투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단단한 발판인 줄 알았던 삶이 갑자기 모래밭처럼 스르르 무너지는 듯한 위기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허망했다.  p. 263      


앞만 보고 달려가던 삶에 균열이 생기는 위기의 순간에 느끼는 우리들의 공통된 마음을 대변하며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십여 년을 살면서 일관되게 해온 질문이 있다. 그건 ‘나는 누구인가’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의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장차 되어야 할 ‘이상적 존재로서의 나’였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가?’였다. 그런 ‘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엄마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니 ‘아름답고 이상적인 나’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했다. ‘지금의 나’는 부정하고 ‘미래에 올 진정한 나’를 향해 성장해야 했다.  p. 26-27      


 ‘지금의 나’와 ‘이상적인 나’ 그 괴리를 없애려는 투쟁이었던 삶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는 ‘지금의 나’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는 자신의 존재성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 궁극점으로서 말이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자신을 만나는 과정의 일환으로 자기를 위해 시골 낡은 집을 사서 고치며 비로소 자기살이를 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엄마 같은 ‘집’의 품에서 원초적 안식을 느끼며 저자는 ‘집을 지은 건 엄마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2. 나를 만나다. 몸. 밥. 집      


엄마 같은 집에서 오래 소외시킨 자신의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찮은 것이라 생각하여 외면한 밥 짓는 일을 하는 일상이 구원임을 발견한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 하나 보니 몸은 고통에 익숙해졌다.... 나는 몸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p. 114     
나는 밥하기 이전에 밥 먹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게 밥이란 그저 생존의 도구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한 번도 따뜻한 밥을 해주지 못했다.  p. 152     


‘여기’ 아닌 ‘거기’를 동경하는 삶을 살면서 소외시킨 근원적인 것이 바로 ‘여기’의 일상이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비로소 몸, 밥, 집의 의미에 대해 눈뜨게 된다.      


돌아보니 지난 십 년이 오십 대를 통과해온 시간이었다. 어떻게 살아왔든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되면 자기 부정과 절망에 부딪힌다. 그 회의나 절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삶을 통합하려면 그동안 소외시켰던 부분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을 소외시켰다. 내게는 숨쉬기처럼 당연한 일상이 없었다. 평생 밥을 먹었지만 ‘밥’이 없었고 평생 몸을 지니고 살았지만 ‘몸’이 없었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었다  p. 317      


3. 나는 우주 생명.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저자는 동학의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를 통해 주관적 심리적 내가 아닌 우주 생명인 나로서의 존재성을 발견한다. 끊임없이 이상적 나를 향해 살아오던 어느 순간 그 허상을 본 것이다. 이미 온우주로 충만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완벽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회와 관습과 제도 등에 의해 강요된 나의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의 우주 생명임에 대한 각성이다.      


내가 찾은 밥의 가장 위대한 언어는 동학의 언어였다. 이천 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이 언어를 얻고 나서 나는 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천 식천. 하늘님인 내게 하늘님을 주는 게 먹는 것이다. 하늘님인 나는 타 존재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타 존재가 이미 하늘님이다. 향아설위,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신다. 자신을 향해 올리는 예배다. 예배는 나 밖의 대상, 신이나 신성한 나무, 바위들을 향해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예배를 이야기한다. 이때의 나는 주관적, 심리적 내가 아니다. 우주 생명인 나다. 우주 생명이 나한테 들어와 있는 거다. 그 생명에게 올리는 예배다. 내가 단순히 오십 년을 산 존재가 아니라, 수억 년의 오십 년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온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이야기다.  p. 163      


더 이상 이상적인 내가 될 필요가 없다. 내 존재성 안에 답이 있으니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일상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비로소 내 몸이, 내 몸을 살리는 밥이, 내 몸이 거하는 집이 별개가 아니라 모두 하늘님이고 하나인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이 우주 생명의 흐름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삶에서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냥’ 살면 되었다. 그러니 죽는다 해도 눈을 감지 못한 한스러움이나 안타까움이 남아 있지 않다. p. 97      


4. 자기 인식을 획득한 자연의 삶을 소망함.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며 그는 ‘자기 인식을 획득한 자연’과 같은 삶을 추구하게 된다.      


영화 (집으로) 속 할머니는 벙어리였다. 입을 봉한 자연의 상징 같았다. 언제든 가서 필요한 것을 얻고 언제든 버리고 떠나와도 되는 말 못 하는 존재. 그러나 지금 내가 되고자 하는 할머니는 ‘자기 인식을 획득한 자연’과 같은 존재다. 착취당하고 대상화되는 무의식적 자연이 아니라 그 쓰라린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기 탐험의 힘을 걸러낸, 상처와 지혜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다.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으로 하강하는, 내 생명과 세계의 신성성에 눈뜬 존재 말이다.  p. 292     


5. 새로워지는 시간     


그 과정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한 삶의 아픔을 지나 자신을 찾고자 하는 계속 적인 갈망은 함께 하는 공부를 통해 인식과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밤에 열심히 텍스트를 읽고 아침이면 뒷마당이 바라보이는 안방 창 앞에서 m과 토론하고 배우고 깨치는 시간이 몇 시간씩 계속되었다. 수년 동안의 아침 공부는 삶의 지극한 기쁨이었다... 이 시간들이 있어서 내 삶의 전환은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과거의 습관들을 바꾸고 모르던 세계를 알게 되었다.  p. 281      


전혀 새로운 눈으로 만나는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순간순간 새로움이고 발견이다.


 시간이 새로워지려면 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한다. 꽃이 피고 지고를 계속하듯이 반복되는 일상을 몸으로 살아야 한다. 몸으로 살아낸 만큼 시간은 내 안에 쌓인다. 풀풀 날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이 된다.  p. 271     




김혜련 안의 나 그리고 내 안의 김혜련      


'김혜련‘ 안에서 나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 김혜련‘이 있다. 나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요구되는 나를 향하여 달려가다 문득 울고 있는 아니 절규하는 나의 소리에 멈칫해버렸다. 나 역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그 질문 앞에 당황하고 공포에 떨기도 했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 진짜 나를 만나기가 너무 두렵다. 그저 적당한 가면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유지하며 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유혹 또한 만만치 않다. 진짜 나를 만나는 과정. 그 과정에 나는 또 이런 책을 만난다. 내가 온우주 온생명. 그래서 괜찮다는 말이다. 네가 온우주 온생명이어서 괜찮다는 말인 것처럼. 너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서 너를 발견하니 너와 나는 무관하지 않다. 하나로 연결되었구나.      


저자는 엄마의 품 같은 집에서 온우주 자체인 자신의 몸을 위해 하늘님인 밥을 베푸는 과정에서 삶 그 자체의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심리적 주관적 나가 아닌 우주 생명인 나. 그래서 삶에서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서의 나. 삶은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시는 과정. 그래서 그저 있는 그대로 완벽한 삶이다.

  

나를 만나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이상적 나’라는 관념에 갇히는 딜레마를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집과 몸과 밥에서 그 실마리를 보았던 김혜련도 그 발견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본다. 지금 나의 질문은 과거의 궤적에서 만들어졌고 질문을 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마음을 열고 배우고 싶다. 나누고 싶다. 온우주 온생명으로 살고 싶다. 그 과정에 만난 한 존재의 삶의 이야기가 딜레마를 겪으며 혼란스러워하고 낙담하기도 하는 내게 위로를 준다.      


나는 더 이상 삶에서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냥’ 살면 되었다. 그러니 죽는다 해도 눈을 감지 못한 한스러움이나 안타까움이 남아 있지 않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070333



작가의 이전글 열정이 사라질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