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는 시간 / 김혜련 / 2020 서울셀렉션
더 이상 달려갈 미래가, 성취해야 할 삶의 목표가 사라진 사십 대 중반,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전투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단단한 발판인 줄 알았던 삶이 갑자기 모래밭처럼 스르르 무너지는 듯한 위기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허망했다. p. 263
오십여 년을 살면서 일관되게 해온 질문이 있다. 그건 ‘나는 누구인가’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의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장차 되어야 할 ‘이상적 존재로서의 나’였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가?’였다. 그런 ‘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엄마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니 ‘아름답고 이상적인 나’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했다. ‘지금의 나’는 부정하고 ‘미래에 올 진정한 나’를 향해 성장해야 했다. p. 26-27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 하나 보니 몸은 고통에 익숙해졌다.... 나는 몸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p. 114
나는 밥하기 이전에 밥 먹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게 밥이란 그저 생존의 도구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한 번도 따뜻한 밥을 해주지 못했다. p. 152
돌아보니 지난 십 년이 오십 대를 통과해온 시간이었다. 어떻게 살아왔든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되면 자기 부정과 절망에 부딪힌다. 그 회의나 절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삶을 통합하려면 그동안 소외시켰던 부분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을 소외시켰다. 내게는 숨쉬기처럼 당연한 일상이 없었다. 평생 밥을 먹었지만 ‘밥’이 없었고 평생 몸을 지니고 살았지만 ‘몸’이 없었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었다 p. 317
내가 찾은 밥의 가장 위대한 언어는 동학의 언어였다. 이천 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이 언어를 얻고 나서 나는 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천 식천. 하늘님인 내게 하늘님을 주는 게 먹는 것이다. 하늘님인 나는 타 존재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타 존재가 이미 하늘님이다. 향아설위,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신다. 자신을 향해 올리는 예배다. 예배는 나 밖의 대상, 신이나 신성한 나무, 바위들을 향해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예배를 이야기한다. 이때의 나는 주관적, 심리적 내가 아니다. 우주 생명인 나다. 우주 생명이 나한테 들어와 있는 거다. 그 생명에게 올리는 예배다. 내가 단순히 오십 년을 산 존재가 아니라, 수억 년의 오십 년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온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이야기다. p. 163
나는 더 이상 삶에서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냥’ 살면 되었다. 그러니 죽는다 해도 눈을 감지 못한 한스러움이나 안타까움이 남아 있지 않다. p. 97
영화 (집으로) 속 할머니는 벙어리였다. 입을 봉한 자연의 상징 같았다. 언제든 가서 필요한 것을 얻고 언제든 버리고 떠나와도 되는 말 못 하는 존재. 그러나 지금 내가 되고자 하는 할머니는 ‘자기 인식을 획득한 자연’과 같은 존재다. 착취당하고 대상화되는 무의식적 자연이 아니라 그 쓰라린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기 탐험의 힘을 걸러낸, 상처와 지혜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다.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으로 하강하는, 내 생명과 세계의 신성성에 눈뜬 존재 말이다. p. 292
밤에 열심히 텍스트를 읽고 아침이면 뒷마당이 바라보이는 안방 창 앞에서 m과 토론하고 배우고 깨치는 시간이 몇 시간씩 계속되었다. 수년 동안의 아침 공부는 삶의 지극한 기쁨이었다... 이 시간들이 있어서 내 삶의 전환은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과거의 습관들을 바꾸고 모르던 세계를 알게 되었다. p. 281
시간이 새로워지려면 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한다. 꽃이 피고 지고를 계속하듯이 반복되는 일상을 몸으로 살아야 한다. 몸으로 살아낸 만큼 시간은 내 안에 쌓인다. 풀풀 날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이 된다. p. 271
나는 더 이상 삶에서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냥’ 살면 되었다. 그러니 죽는다 해도 눈을 감지 못한 한스러움이나 안타까움이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