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나서기 전에 쓰는 글
바다가 보고 싶었다. 목이 말랐다. 자발적인 강제 속에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자유를 원하고 있었다. 장소와 상관없이 자유는 마음에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면 보이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좀처럼 시간이 허락되지 않고, 용기도 잘 생기지 않았다. 당분간은 긴 여행도 힘든 상황이라 가까운 곳이라도 코에 바람을 쐬이고 싶었다. 혼자 가면 좋지만 이것저것 준비하는 게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동행이 필요하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내가 운전하지 않아도 되고, 숙소나 식당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허락되는 경우는 지금 내게 남편찬스 밖에 없다. 그래서 남편과 1박 2일 여행길에 나서기로 했다.
“10시 전에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요.”
휴일 하루 전이 내가 다니는 직장의 재량휴업일이라 황금 같은 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휴일전날 부장의 메시지 “휴일동안 모든 걸 잊으세요!” 그렇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고민거리들은 일상으로 침투하고 저녁이나 밤이나 심지어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조차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다닌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 여행이라는 장치는 이럴 때 아주 효율적이다. 모든 걸 잊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래도 집을 나서느라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다. 나이와 함께 챙겨줘야 할 보조 영양제, 약, 물품들이 있는 걸 보니, 상관없이 언제든 아무 때나 훌쩍 떠날 수 있는 청춘이 부러워진다. 장비를 많이 들고 이동해야 하는 부담이 여행을 주춤거리게 만드나 보다. 그러니 다리가 떨릴 때 아니라 심장이 떨릴 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맞다.
조금 느긋하게 마시는 모닝커피가 너무 달다. 이 정적이 너무 황홀하다. 저녁부터 비소식이 있긴 하지만 새벽부터 새들은 지저귀고, 아침에 만나는 만물의 움직임과 소리들이 적당히 기분이 좋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를 기분 좋게 누린다. 여행이 기다리고 있고 나는 아무것도 해야 할 의무 없이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겨보리라.
사람의 유형을 카테고리화하는데 나는 반대하지만 타고난, 그리고 환경에 의해 익숙해진 성격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유형테스트 검사((MBTI)를 해 본 결과 아주 오래 전의 결과이긴 하지만 나의 유형은 INTJ. 심리상담과 관련한 세미나에는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이 100여 명 정도 되었다. 심리유형 검사 후 유형별로 나뉘어 앉아 각 유형의 이름을 짓게 했다. 확실히 유형별로 앉으니 각 그룹의 특성이 쉽게 드러났다. E 유형이 앉은 곳은 처음부터 왁자지껄했고 I 유형들은 뭔가 조용히 혹은 진지하게 의논하는 모습이다. 우리 유형의 이름은 글쎄 planner였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러니 여행을 갈 때도 치밀하게 계획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내가 그런 사람 축에 속했다. 그래서 계획이 되지 않으면 나서기를 두려워하니 선뜻 일을 저지르지 못한다. 그런 내게 이번 여행은 제대로 황금기회이다. 계획이 필요 없다.
정작 새로운 감각으로 진짜 나를 찾고 싶다면 탐험을 해야 한다. 모험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성격을 다르게 본다. 탐험이 아닌 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쉬고, 먹고, 즐기리라. 리드해 주는 남편이 있으니 모험심이 요구되지 않을 테니 충분히 쉬리라. 일상의 많은 부분을 잊고 나면 새로운 힘이 생기리라.
공간이 달라지면 사람의 새로운 면을 만나게 된다.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동행하는 벗을 그저 한 인간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관찰하리라. 그리고 만나리라.
살아갈 힘이 소진된 상태를 번아웃이라고 한다. 나는 살면서 몇 차례 번아웃을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적이 있다. 젊을 때는 너무 많은 일에 치여 그랬지만, 나이가 드니 너무 공허해서 힘들기도 했다. 지금은 두 가지 다 겹쳐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갈되기는 마찬가지다. 고갈되었다. 샘이 다 말라버렸다. 퍼주기만 하다 보니 내가 공급받는 것이 없다. 뭐 그런 상태다. 어린 학생들은 많이 퍼 주어야 한다. 그들이 내게 주는 기쁨이 없지 않지만, 아직은 아이들은 나를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나는 누구에게서 공급받을 수 있지? 때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힘을 얻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도 한 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 힘은 내 안에 있겠지만 그걸 끌어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여행이 하는 것 같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내 안에 숨겨진 본성을 깨워보기로 했다.
여행광인 내 친구는 “인생은 어차피 두 가지로 나뉘어. 여행을 위한 준비와 여행이지” 그는 거의 일 년의 대부분을 여행과 여행준비로 보낸다. 가족 뒷바라지로 상당히 빡빡한 일상을 보내는 그에게 유일한 낙이 바로 여행이다. 물론 국내 국외 가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이 뒷받침하긴 하지만, 그는 뭔가 여행에 중독이 될 정도로 여행의 맛을 느낀 것에 틀림없다. 나는 전혀 다른 쪽이었다. 여행을 그리워하지만 심각하게 내적으로 올라오는 갈망 같은 건 없었나 보다. 누군가 끌어주기를 늘 바라며 과감하게 내가 저지르지는 못하는 애매한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꼴이었으니. 숙제 같은 일들을 하나둘 하고 나니 많이 허락된 시간이지만 코로나 탓하며 움직이지 못했고, 이제는 일에 묶여 또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야 내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떠나라.
작은 여행을 시작으로 나는 떠날 것이다. 그리고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라 고백한 어느 작가의 말처럼 진짜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그 맛을 느끼고 나는 나의 일상에서 여행의 맛을 누리는 순환을 경험하고 싶다.
모처럼 나들이를 나서며 마음이 설렙니다. 여행 출발 전에 잠시 생각을 대략 정리해 보았는데 다녀온 후 어떤 소회를 남길지 저 자신도 궁금합니다. 어차피 여행이라는 이 말 어디서 들은 건지 제 속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참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인생은 어차피 여행이네요. 이전 버전으로 표현하면 나그넷길이라는. 오늘 진짜 나그넷길을 떠나 보렵니다. 저녁에 비소식이 있습니다.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