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유희. 헤르만 헤세. 이영임 역. 2021. 민음사
유리알유희를 며칠에 걸쳐 읽었다. 쉽지 않았다. 글로 정리하는 건 더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쉽게 접근하기로 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고민하니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왜 우리가 하나일까?라는 것은 내 오랜 질문이었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런 질문에 이 소설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양극성의 단일성으로 함축할 수 있는 헤세의 내면 사유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소설이고 이 소설은 헤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다 주었다.
헤세의 작품을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후기까지 따라오면서 읽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독법도 괜찮다는 것을 조심스레 추천한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한 작가의 작품에 집중하는 것 꽤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10년에 걸쳐 기록한 이 작품에는 이전의 작품에 나왔던 인물들이 오버랩된다. 그만큼 이 모두가 헤세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크네히트로 표현되는 작중 주인공은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다. 그가 이 양극성을 어떻게 균형 잡는지에 집중하면 된다.
이전의 글들에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보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쪼개면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초기에 이어 1차 세계대전부터 히틀러 집권까지의 중기 그리고 그 이후의 후기로 나눈다. 초기작품으로는 이전에 살펴본 『수레바퀴 아래서』가 해당되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주로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신문, 잡지에 반전 메시지의 글을 발표했다. 헤세는 당시 전쟁에 열광하던 독일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해 책의 출판을 타국에 의존해야 했다. 『데미안』, 『싯다르트』, 『황야의 이리』가 이때 작품에 해당한다. 이 때는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사망하고, 부인이 정신분열증세를 앓고 막내아들까지 병을 얻어 정신분석을 받을 정도의 정신적인 타격이 있었다고 한다. 둘째 부인과 이혼한 후 세 번째 부인 니논과 재혼한 개인적인 변화의 시기인 후기에는 자신의 일생을 관통하는 질문이 더 강력하게 녹아있는 『동방순례』, 『유리알유희』를 집필한다. 당연히 『유리알유희』는 독일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2차 대전이 끝난 1946년에 스위스에서 출판된다. 『동방순례』는 절판이 되었다. 대중적인 소설이 아님에 틀림없다. 도서관에서 대출가능한지 알아보려는 중이다.
<유리알 유희>
우주의 음악에, 명인의 음악에
경건하게 귀 기울이며,
축복받은 시대의 고귀한 정신들을
정결한 축제에 불러내려 하노라.
마술적 상형문자의 신비에 의해
우리들 드높이 고양되누나, 그 주술에
가없는 것, 몰아치는 것, 삶 자체가
명징한 비유로 녹아 있기에.
비유들은 성좌처럼 투명하게 울리고
작용하여 우리 삶에 의미가 되네.
거룩한 중심을 향하는 것 외에
누구도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리.
크네히트의 유고 중 시
유희는 학생들과 연주가들 사이에서 행해진 일종의 재치 있는 기억 및 조합 연습이다. 실제 존재했기도 한 유리알을 이용한 유희는 헤세의 소설에서 상상력이 가미된 듯하다. 원래 유리알이란 영리하고 사교적이며 사람을 좋아했던 음악 이론가인 칼브 태생의 바스티안 페로트가 발명해 문자나 숫자, 음표 또는 다른 그림 부호 대신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쉬츠, 파헬벨, 바흐 시대에 부지런한 음악도나 대위법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성행했다고도 한다.
페로트는 구슬들을 꿰어 늘어놓아 만든 아이들용 계산 기구를 본떠 수십 개의 철사 줄이 쳐진 틀을 하나 짜고, 그 줄에 크기와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유리알들을 나란히 꿰어 늘어놓았다. 철사 줄은 악보의 오선이고, 유리알은 음표에 해당. 유리알을 사용해 음악적인 인용을 나타내고, 머릿속에 떠오른 주제를 구성하고 변화시키고 변조하고 발전, 다시 전개해 다른 것들과 대비시키기도 했다..... 학생들의 유희와 페로트의 유리알 달린 철사 줄에서 시작된 것이 훗날 대중적이 되어서 유리알 유희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p.40
1. 유리알 유희 서문
2.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3.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 - 시 그리고 세편의 이력서 1) 기우사 2) 고해사 3) 인도의 이력서
논문 형식의 서문과 크네히트의 유고 사이에 크네히트의 일상을 다루는 소설이 배치되어 있다. 세편의 이력서에 역시 크네히트가 주인공인 세 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크네히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체 네 개의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점은 대칭이 되는 두 세계, 예컨대 개인과 사회, 자유와 구속, 늙음과 젊음, 선과 악 등의 세계 속에서 갈등하며 성장하며 길을 찾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이야기는 두번째의 전기에서 드러나는 유희명인으로서의 크네히트의 갈등, 결단의 이야기가 주된 축을 이루고 있고, 유고의 세편의 이력서에서 서술된 세편의 이야기는 이것을 보완하며 같은 중심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선사한다.
헤세의 삶과 작품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양극의 단일성 문제가 이 작품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인간의 존재는 양극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갈등한다. 갈등의 최정점은 현실에서 세계대전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아군이 있으면 적군이 있다. 그 명분 하에 일어난 전쟁은 전쟁과 상관없는 많은 생명을 혼란에 빠뜨렸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서 만나는 너무나 많은 양극 즉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남과 여, 선과 악, 욕망과 금욕 등 그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것을 선택할지 몰라 망설인다. 당시의 정신세계 역시 이런 양극성 사이의 줄다리기 속에 있었다. 헤세는 평생의 화두 양극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가를 ‘유리알 유희’ 속의 크네히트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남몰래 갈망하지...>
우아하게, 정신적으로,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현묘하게
우리의 삶은 요정의 그것인 양
살랑이고 춤추며 허무의 둘레를 도는 듯하다
존재와 현재를 제물로 바쳐 가며.
숨결 불어넣어져 그리 맑게 울리는
꿈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운 유희여,
네 명랑한 표면 속 깊숙이에선
밤과 피와 야만에의 동경이 희미하게 타고 있구나.
공허 속을 자유롭게, 강요도 고난도 없이,
우리의 삶은 돌고 있네, 언제나 유희할 준비가 된 채,
그러나 우리는 남 몰래 갈망하지, 현실을,
생식과 탄생을, 번뇌와 죽음을,
<단계>
꽃이 모두 시들 듯이,
젊의 나이에 굴복하듯이,
지혜도, 덕도, 인생의 모든 단계도
제철에 꽃피울 뿐, 영원하지 않네.
생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용감하게
새로이 다른 인연으로 나아가도록
이별과 새 출발을 각오해야 하지.
그리고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명랑하게 나아가야지
어디에도 고향인 양 매달려선 안 되네
우주 정신은 우리를 구속하고 좁히는 대신
한 계단씩 올려 주고 넓혀 주려 한다.
생의 어느 한 영역에 뿌리내리고
친밀하게 길드는 바로 그 순간, 나태의 위협 밀려오나니
떠나고 여행할 각오된 자만이
습관의 마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
죽음의 순간에조차 아마 우리는
젊게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른다.
새으이 부름은 결코 그치지 않으리니...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완벽한 유리알 유희의 명인에 이른다. 그러나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 존재하는 세계 카스탈리안에서의 위기를 발견하고 더 높은 제3의 단계로의 도약을 감행한다. 양극성은 전임 음악 명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세속을 대변하는 듯한 카스탈리안의 학생 데시뇨리와의 관계에서 , 그리고 비종교적인 카스탈리안의 대척점에 있는 종교성의 상징 야코부스 신부와의 관계에서 갈등과 통합의 과정을 거친다. 또한 크네히트의 유고로 남겨진 세 편의 이력서에서도 <기우사>의 투루와 크네히트의 관계에서 <고해사>에서 디온푸길과 요제푸스 파물루스의 관계에서 <인도의 이력서>에서 요가 수도자와 제자 사이에서 신비로운 순환의 고리가 완성된다.
이렇게 멋진 헤세를 만나고 있다니 더운 여름에 대한 보상처럼 보인다. 여행, 만남, 활동 등을 뒤로한 채 나는 방 안에서 헤세를 매일 만났다. 지금도 만나고 있고 앞으로 당분간 자주 그의 서재에서 정신세계를 들러볼 예정이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었고 개인적인 사생활도 녹록지 않았던 헤세. 내면을 뒤흔들었던 존재에 관한 질문을 정통으로 마주하며 고뇌하였던 그는 글로 그 과정을 남겼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의 고뇌를 시대를 너머 공감할 수 있음은 인간이 갖는 질문이 동일하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스승과 제자, 금욕과 본성, 선과 악 등의 이중 구조로 나누기 때문에 생겨나는 다양한 문제들은 그것을 초월하여 만나는 지점을 지향할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할 것 같다. 싯다르타의 미소, 싱클레어의 알을 깨는 성장통, 황야의 이리의 울부짖음 후의 변화, 그리고 이 작품에서 4가지 형태로 변주되는 크네히트의 귀착점. 소설은 묵직하게 진동을 일으키는 것 같다. 미증유의 더위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고 그 어느 지점에서 초라한 개인들은 당황하고 있다. 나 역시 헉헉대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그 가운데 위대한 정신을 선물처럼 받았다. 내게는 너무 벅찬.
태풍이 북상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조금 전 산책하러 갔는데 산책로를 폐쇄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더더욱 민감해진 요즘이다. 부디 별일 없기를. 우리 모두의 일상이 일상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