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헤세. 박병덕역. 2002. 민음사
자기를 빙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버리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던 이 순간으로부터, 냉기와 절망의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예전보다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응집시킨 채, 싯다르타는 불쑥 일어났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고 느꼈다. 이윽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떼더니, 신속하고 성급하게 걷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집으로 가는 것도, 이제 더 이상 아버지에게 가는 것도, 이제 더 이상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p.64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 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p. 61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치 한 마리 작은 짐승이나 한 마리의 새, 또는 한 마리의 토끼라도 된 듯, 가슴속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어느 누구도 그만큼 외로운 사람은 없었다.
p.64
싯다르타는 장사하는 법,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법, 그리고 여자들과 즐기는 법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옷을 입는 법, 하인들을 부리는 법,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물속에서 목욕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섬세하고 꼼꼼하게 마련한 요리, 생선과 들짐승과 날짐승의 고기, 양념과 단 음식을 먹는 법을 배웠으며,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고 만사를 잊게 해 주는 술을 마시는 법도 배웠다. 그는 주사위 놀이와 장기 놀이를 하는 법, 무희들을 감상하는 법, 가마를 타는 법, 그리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잠자는 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유별난 존재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고 느꼈으며, 언제나 그들을 약간 조롱하는 마음으로, 약간 비웃는 듯한 경멸감을 가지고, 그러니까 사문이 속세 사람들에 대하여 변함없이 느끼는 바로 그런 경멸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p. 112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식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에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하여 무화無化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 안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식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추구함이 없이, 이처럼 단순소박하게,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p.72
그는 그들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과 통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였으며, 그 자신도 더불어 그런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비록 그가 완성의 경지에 가까이 가 있었고, 최근 마음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러한 어린애 같은 인간들이 자기의 형제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이제 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잇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梵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지식인이자 사색가인 자기가 그들보다 앞선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미하고 사소한 그 한 가지란 바로 그 의식, 즉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p. 187
강에 숨어 있는 무수한 비밀들 가운데에서 그는 오늘 단 한 가지만을 보았을 뿐인데, 그것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가 본 비밀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가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 오, 과연 그 누가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으리! 그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예감이, 먼 기억이, 신의 음성들이 활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p.147
그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은 서로 구분할 수가 없었으니, 기쁜 소리를 슬픈 소리와 구분할 수도, 어린애 소리를 어른 소리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움에 애타는 탄식 소리, 깨닫는 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수천 갈래로 얽혀서 서로 밀착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합해져서 사건의 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이 강에, 이 수천 가지 소리가 어우러진 노래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가 고통의 소리에도 웃음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어떤 특정한 소리에 묶어 두거나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 위에 깨달음의 즐거움이 꽃피었다. 어떤 의지도 이제 더 이상 결코 그것에 대립하지 않는, 완성을 알고 있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동고동락의 마음으로 가득 찬 채, 그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사건의 강물에, 그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얼굴은 그 표면의 아래쪽 저 깊은 곳에 있는 수천 겹의 신비로운 문이 다시 닫혀 버리고 난 다음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으며, 그윽하고 부드러운, 어쩌면 매우 자비로운 듯하기도 하고, 어쩌면 조소하는 듯하기도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것은 세존 고타마가 미소를 지었던 모습과 아주 똑같은 모습이었다.
고빈다는 허리를 굽혀 큰절을 올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의 늙은 빰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그의 가슴속에서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 가장 겸허한 존경의 감정이 마치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그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했었던 그 모든 것,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치 있고 신성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 그는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싯다르타에게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p.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