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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Jul 27. 2023

황폐한 내면의 울부짖음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김누리역. 2002. 민음사


     

전쟁, 문명 그리고 위선적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표현되는 헤세의 작품들은 시대의 산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 속에 시대를 살아간 한 개인의 고뇌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신기한 것은 세기를 건너온 그 고뇌가 지금 이 시간에도 의미 있게 울린다는 점이다. 지금 21세기에 우리는 양상이 다른 전쟁, 문명의 끝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점점 야수적이 되어가는 권위의 횡포 앞에 서 있다.     

  

내면세계의 탐구, 잃어버린 자아의 탐색으로 일관한 그의 작품은 초기의 낭만적 서정성에서 문명비판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다. 『황야의 이리』는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리고 해체된 정신분열증적 증상으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내면의 고백이다. 책의 구조는 낯설다. 역자의 해설을 먼저 읽고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자전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나는 이 작품은 헤세 자신이 실존적 위기의 시절에 겪었던 경험들과 무관하지 않다. 두 번째 결혼을 하였던 루트 뱅어와 이혼한 후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한 시기에 가구가 딸린 다락방을 빌려 혼자 지냈다고 한다. 이때 『황야의 이리』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1921년 C.G. 융의 정신분석을 받았다.     

 

자전적인 체험과 소설의 허구성 그리고 융의 심층심리학의 기본 사상이 어우러져 『황야의 이리』가 탄생했다. 헤세는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카타르시스>라는 말로 요약했다고 한다. 불가능한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 절망 속에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앓는 한 이상주의자, 원형적인 상징 인물을 만나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새로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     

 


책의 구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I 편집자의 서문 / 하리 할러가 세든 집의 조카 

II 황야의 이리론 

III 하리 할러의 수기     

 

<편집자의 서문>은 『황야의 이리』속 등장인물인 하리 할러가 세 들어 살던 집 조카가 쓴 허구적인 이야기로 앞으로 소개될 수기에 대한 도입부의 역할을 한다. 두 번째 <황야의 이리론>은 작가를 알 수 없는 글로 황야의 이리의 내면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이를 역자는 <메타 메타 픽션적> 특성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하리 할러의 수기>에서 본격적으로 하리 힐러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내용

      

50대의 지식인 하리힐러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은둔자처럼 외톨이로 살아간다. 주변과 어울리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요즘말로 한다면 분열증 환자이다. 그의 내면은 인간과 이리 즉 길들여진 승화된 본성과 승화되지 않은 거친 야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의 정점에서 자신의 무기력한 절망상태를 끝내기 위해 늘 자살을 생각한다. 창녀 헤르미네, 관능적인 마리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속으로 무시하던 색소폰 연주자 파블로에게서 정신적, 심리적 섬세함을 발견한다. 갈등의 해결은 소설의 결말부의 의식의 형태를 통해 실현된다. 모차르트, 괴테로 나타나는 <불멸의 존재>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내면의 갈등       


인생은 지독히도 쓴맛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끓어오르던 구역질이 절정에 달하는 것을, 삶이 나를 집어던지고 내쫓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아!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로 생각을 날려야 하는지, 어디에도 기쁨은 기다리지 않고, 어디에도 날 부르는 소리는 없다. 어디에도 나를 유혹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썩은 진부함과 게으른 얼치기 만족의 냄새를 풍기고, 모든 것이 잿빛이고, 낡고, 시들고, 늘어지고, 기진맥진해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어떻게 내가, 재능 있는 젊은이요, 시인이요, 뮤즈의 친구요, 세계 방랑자요, 불타는 이상주의자인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 마비가,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한 이 증오가, 모든 감정이 꽉 막혀버린 이 상태가, 이 몹쓸 놈의 뿌리 깊은 권태가, 텅 빈 가슴과 절망이라는 이 더러운 지옥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천천히 기어들 듯이 나에게 닥쳐왔단 말인가? 

p.104     
나는 허위적이고 점잔 빼는 길들여진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p.117   


..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매시간을 원치도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을 방문하고, 오락을 하고, 업무 시간에 앉아 있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을 하기 싫은데도, 마지못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기계로 해도 얼마든지 잘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그들이, 내가 하듯이, 자기 삶에 비판을 가하고, 삶의 어리석음과 천박성, 끔찍할 정도로 오만상을 찡그리고 다가오는 삶의 애매성, 삶의 가망 없는 슬픔과 황량함을 인식하고 느낄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영원히 반복되는 기계적인 운동이다. 아아! 그들이 옳다. 언제나 옳아. 궤도를 이탈한 나처럼, 사람을 울적하게 하는 이 기계적인 운동에 저항하다 절망하여 공허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꿈놀이를 하고 나름의 중요한 일들을 쫓아다니며,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

p.109          



내면의 분열

       

하리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수백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이를테면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p.82     
인도 서사시의 주인공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집합체였으며 의인화된 집단이었다.... 우리의 황야의 이리도 가슴속에 두 개의 영혼(이리와 인간)을 품고 있다고 믿고,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이미 몹시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가슴, 즉 육신은 언제나 하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영혼은 둘도 다섯도 아니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고대 아시아인이었다. ...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우리의 보잘것없는 백치의 언어처럼 그렇게 소박하지도 않다. .... 인간이란 결코 확정적이고 영속적인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시도요 과도이며, 자연과 정신 사이에 놓인 좁고 위험한 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정신 쪽으로, 신 쪽으로 몰아대는 것은 내면의 명령이며, 그를 자연 쪽으로, 어머니 쪽으로 돌아가도록 잡아끄는 것은 절실한 동경이다. 이 둘 사이에서 두려움에 떨며 동요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일시적인 시민적 합의에 불과하다. 거친 충동은 이러한 관습에 의해 거부되고 금지되며, 얼마간의 의식과 예절과 교화가 요구된다. 정신은 아주 조금만 허용되고 요구될 뿐이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인간이란, 시민의 이상이 모두 그러하듯이, 하나의 타협, 즉 심술궂은 태초의 어머니인 자연과 까다로운 태초의 아버지인 정신을 속여 그들의 심한 요구들을 뿌리치고 이 둘 사이의 미지근한 중간 지대에 살려고 하는 시도이다. 그래서 시민은 자기들이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하고 묵인하면서도, 동시에 개성을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는 화신인 <국가>의 손아귀에 넘겨주고, 이 둘을 반목시켜 늘 어부지리를 얻는다. 그래서 시민은 오늘 이단자로 화형에 처하고 죄인으로 교수형에 처한자를 위하여 내일은 기념비를 세워주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요구이며, 그 실현을 갈구하면서도 또 겁내는 하나의 먼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가는 도정은 언제나 무서운 고통과 무아경 속에서 그저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 길을 가는 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에게는 오늘은 단두대가 내일은 기념비가 마련될 것이다...... 진정한 인간에 이르는 길, 불멸에 이르는 길을 하리는 분명 예감할 수 있고, 또한 때때로 주저하면서도 그 길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그 대가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겪지만, 하리는 하나뿐인 불멸로의 좁은 길을 가라는 저 지고의 요구와, 정신이 추구한느 저 진정한 인간됨을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워하고 있다....

p.85               



자신을 인식함


나는 고난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을 이제야 다시 알게 되었다. 이 영상들이 파괴되지 않고 계속 존재할 내 삶의 재산이요 가치이며, 잊을 수는 있으나 없앨 수는 없는 별처럼 영원한 체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의 전설이며 그것의 광채가 파괴할 수 없는 내 존재의 가치라는 것을 알았다. 내 인생은 고난과 방황과 불행이었고, 체념과 부정을 향해 내달렸다. 내 인생은 인간운명의 소금에 절여져 쓰디쓴 것이었으나 또한 풍성하고, 자랑스럽고, 부유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난 속에 있었다 해도 왕과 같은 품격을 지닌 인생이었다. 가련하게도 결국 몰락의 길을 갈지라도, 내 인생의 핵심은 숭고했고, 나의 용모는 훌륭했고, 혈통도 좋았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별이었다.

p.192     



 자신과의 화해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다. 나는 어딘가 등뒤에서 그의 무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 272          


삶의 양극성과 대립성을 넘어선 단일성의 체험   


이리와 인간으로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둘이 아니라 수백 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 그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해체의 상태를 경험하는 하리는 마지막 의식儀式을 거치면서 해체된 자신을 통합하게 되는 인식에 이른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그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아니고 자기 주머니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임을 포용하는 순간이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층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소설 형식을 깨뜨린 파격적 형식의 어지러움이 있지만 나도 모르게 글의 서술에 빨려 들게 되었다. 분열되어 갈등하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의 하리의 모습은 동일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분열을 해결하는 돌파구로 제시된 유머가 상징하는 바는 비판하지 않는 포용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멸의 존재의 상징이자 유머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모차르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로 보인다. 내면의 길을 통한 자아해방의 여정을 계속 따라가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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