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018. 현대지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21-180)는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였다.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로 치세기간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가 좋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평가된다. 146년부터 피우스 황제와 공동으로 통치하였고 161년 피우스 사후 단독으로 180년까지 통치하였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세계사 속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대를 꼽으라고 한다면, 인류는 주저 없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때로부터 코모두스가 즉위하기 직전까지의 기간을 꼽을 것이다’라는 평가로 그의 탁월한 통치를 반증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 생애 말기 외적의 침공 제압하기 위해 제국 북부 전선이었던 도나우 지역으로 원정을 가야 했다. 오랜 기간 전쟁터에 있었던 셈인데 그 10여 년에 걸쳐 쓴 철학일기가 바로 유명한 『명상록』이다.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수사학자였던 프론토를 비롯 유명한 스승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12세부터 철학에 깊은 흥미를 가졌던 그의 철학적 사고가 녹아있다. 『명상록』은 전쟁터에서 그리고 황제로서 여러 가지 압박감이 컸던 시기에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그리고 나아가 후손에게 들려주는 교훈이었다.
따져보니 50-60세에 썼던 기록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글들을 읽으니 당당함이 느껴진다. 평균수명이 연장되었고 발달된 의료기술로 길어진 노년만큼 고민은 깊어졌다. 건강한 노년을 위한 방법론으로 다양한 연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운동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다양한 취미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여전히 필요한 사회활동 및 인간관계, 그래서 노년에게 필요한 일자리, 무엇보다 중요한 노후자금등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이것들과 관련한 시장도 더 활성화될 전망이다.
나 역시 이 단어가 점점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시기이다. 이론 아니라 실제 경험하는 이 시기에 느끼는 공허감이 있다. 문제는 늙어감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죽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 항상 답답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따위의 질문은 늘 내가 생각할 질문이 아니어 구석에 밀어두던 질문이었다. 이제는 때가 된 것일까? 『명상록』제목도 참 따분해 보여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이었는데, 어쩌다 내 책 목록에 들어갔고 한번 집어 든 책을 손에 놓지 못하고 계속 읽게 되었다. 과연 당대 그리스 철학을 온몸으로 익혔던 황제답다. 요즘 시대에 흔히 보는 지도자들의 모습과 너무 차별화된다. 게다 2000년 이전의 기록이 지금 이 시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우엘리우스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계속 성경의 전도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생각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가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9
머리 희끗하여지고 시력도 희미하고 기력도 쇠한 노인들의 단골암송구절쯤으로 여겨지는 구절이지만 인생의 지혜를 함축하고 있다. 유대의 왕으로 최고의 시기를 향유했던 솔로몬왕의 고백이다. 그는 모든 것을 누려본 후 인생에서 주로 갈망하는 것들이 사실은 다 없어진다는 것에 주목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서 귀중한 사람들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간단한 게 참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을 제쳐놓고 비본질적인 것에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시간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래야 했으니까.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다 죽어가는 많은 환자들을 살리 의사들도 결국에는 죽었고, 다른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는 많은 예언들을 한 점성술사들도 결국에는 죽었으며, 죽음과 불멸에 대해 무수히 연구하고 논쟁을 벌인 철학자들도 결국에는 죽었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적군을 도륙한 위대한 장군들도 결국에는 죽었으며,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서 안하무인이 되어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폭군들도 결국에는 죽었고, 헬리케와 폼페이와 헤쿨라네움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도시들 전체가 죽었다”는 것을 너는 늘 명심하라.
너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지를 늘 유념해야 한다. 어제는 진액이었다 내일은 미라나 재로 변한다. 올리브 열매가 다 익으면 자기를 낳아준 대지를 찬양하고 자기를 길러준 나무에 감사하며 떨어지는 것처럼, 너도 이 짧은 인생을 본성에 따라 살아가다가 인생 여정을 끝낸 후에는 기쁜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명상록 4권 48
모든 사람이 죽는다. 아우엘리우스는 재차 이 표현을 쓴다. 소크라테스도 죽었고 시대를 풍미했던 그 잘난 사람들 다 죽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니 인생 별거 아니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인간자산 세 가지를 떠올린다면 재산, 명성보다 스스로가 가진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는 그 무엇보다 정신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정신. 그 정신을 바로 차리고 사는 것 만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임을 강조한다. 몸은 죽지만 정신은 우주 속으로 환원된다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여하튼, 살아서 그 정신을 가지고 사느냐 놓치고 사느냐의 문제로 함축할 수 있겠다. 대부분은 그 정신을 놓치고 산다고 주장한다.
그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이다. 나와 너는 다르지 않다. 모두 용서해야 한다. 화낼 필요가 없다. 얼마 전에 용서에 대해 고민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그는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행했을 때 화낼 필요 없이 그저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는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만약 히틀러와 같은 극악한 경우는 어떨까? (나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해 의문부호를 두고 있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을 대입해 본다면 히틀러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 즉 한 형제이므로 용서하되 그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여하튼 그는 모든 인간과의 연결성을 항상 강조한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너의 남은 생애를 허비하지 말라.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생각하고 계획하는지를 상상하는 것 같은 일들은 너의 주의를 흐트러놓아서 너 자신을 다스리는 이성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네게 진정으로 유익이 될 다른 일들을 할 기회를 뺏을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선한 자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미루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바르게 대하는 사람은 신들의 사제이자 종이다. 그런 사람은 쾌락에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고, 온갖 고통에 굴복하지 않으며, 그 어떤 해악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어떤 해악도 의식하지 않으며, 모든 싸움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싸움에서 투사가 되어 그 어떤 정념에도 지지 않고, 정의감에 충만하며, 자기에게 일어나고 주어지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공동선을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행하며 생각하는지를 살핀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는 데만 열중하고, 우주 속에서 자기에게 할당된 일들만을 늘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 완수하고, 자기에게 할당된 일들은 무엇이든지 선하다고 믿는다. 각 사람에게 할당된 운명은 우주 안에서 그에게 주어져서 그를 우주 속으로 끌어들여 동화시키기 때문이다.
명상록 4권 4
결국 정신의 고귀함을 따라,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산다면 죽음도 나쁜 것이 아니고,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주 평안해진다. 자꾸 부정적인 생각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다. 매일 조금씩 읽으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년도 나쁜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삶의 과정이다. 당연히 기운이 쇠락하여 몸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이 또한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노년이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기죽을 이유 없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면 된다. 많이 먹지 못하면 조금만 먹으면 되고, 많이 움직일 수 없으면 조금만 움직이면 된다. 그 또한 괜찮을 것이다. 이전과 같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전 같은 청춘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주어진 것을 즐기면 된다. 영원히 젊음으로 산다면 이것 또한 문제이다. 떠날 때 떠나야 한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이 시간을 살면 된다. 늙어가는 이 모습을 사랑할 것이다. 젊은이 같은 힘은 없어도 노년으로 당당하게 살 것이다. 괜찮다. 오늘도 하루를 맞이할 수 있어 감사하다. 내 옆의 사람들이 귀하고 고맙다. 글을 쓸 수 있어 고맙다. 부족한 글을 방문하여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 고맙다. 황홀함은 이런 것이다.
매일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듯이 살아가면서도, 거기에 초조해하는 것이나 자포자기해서 무기력한 것이나 가식이 없다면, 그것이 인격의 완성이다.
명상록 6권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