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행복론. 5장
웃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잘못된 생각이 주입되었다.
인생은 화려하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니 열심히 달려라!
물론 열심히 달려서 얻는 가끔씩의 보상이 없지 않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보답이 되고 지위를 얻어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 뭐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 대부분이 추구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불행히도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행복감을 느끼는 시간이 순간적이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더 높은 단계를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욕심이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손질하면 하루 기쁘고, 집을 사면 한 달 기쁘고, 결혼을 하면 1년 기쁘고 하는 영국속담이 행복감의 유한성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런데 고통은 어떠한가? 손가락 끝이 아픈데도 몸의 다른 부분의 건재함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관심은 온통 손가락 끝에 가 있어 삶이 고통이 된다.
행복은 꿈에 불과하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플로리앙 후작에게 보내는 편지』볼테르
분별 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7권 12장)
모든 쾌락과 행복은 소극적 성질을 띠는 반면 고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띤다... 온몸이 건강하고 온전하지만 몸의 어디에 조그만 상처가 있거나 아픈 경우, 몸의 전체적인 건강은 의식되지 않고 상처 부위의 통증에만 계속 신경 쓰여, 건강한 느낌에서 오는 유쾌한 기분이 사라진다... 이 경우 침해받는 것은 의지다. 신체로 객관화된 의지. 의지의 충족은 언제나 소극적으로만 이루어지므로 직접 느껴지지 않고 기껏해야 성찰의 과정을 통해 의식된다. 의지의 억제는 적극적인 것이라서 스스로 그런 사실을 알린다. 모든 쾌락은 단순히 이러한 억제의 제거에, 억제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으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 『행복론』5장
그래서 쇼펜하우는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을 재는 잣대라고 했다. 소극적인 행복과 달리 고통은 적극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기에, 즉 고통은 현실이기에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의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라틴어에서는 행복하게 산다가 ‘그럭저럭 살아가며 삶을 견뎌낸다’라는 의미이고, 이태리어에서는 ‘그럭저럭 헤쳐 나가다’의 뜻으로 풀이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좀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도 이해가 된다.
“인간의 일은 무엇이건 크게 애쓸 만한 가치가 없다” 『국가』 10권 604. 플라톤
세상의 소유물이 다 사라진다 해도
슬퍼하지 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세상의 소유물을 다 가졌다 해도
너무 기뻐하지 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고통과 환희도 지나가 버리는 것이니,
세상을 지나쳐 가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안와리, 소헤이리, 사다의 교훈시 『굴리스탄』
젊은 시절에는 환영 같은 신기루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행복의 상像을 향해 열심히 달리지만 결국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아는 지점에 도달한다고 한다. 지금도 성공한 (적어도 우리 눈에 그렇게 비치는) 사람들이 성공의 비결을 이야기하는 책, 강연, 영상들이 많다. 대부분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따르려고 그들의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따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체가 손에 잘 쥐어지지 않는다는 점이고 언제나 뭔가 부족하고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고생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경험이다. 정말 열심히 산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다. 웃을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웃을 일을 찾으려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잠시 웃기도 하지만 그건 순간뿐이다. 금세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꾸 노력을 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글쓰기조차 그런 과정에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으면서 내 태도의 불합리성을 보기 시작했다. 행복은 소극적이고 고통은 적극적이다. 그러니까 고통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다.
고뇌가 없는 동안에는 불안해하는 소망이 존재하지도 않는 행복의 환영을 눈앞에 그려 보이며, 우리를 미혹해 그 환영을 좇게 만든다.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고통을 우리에게 끌어들인다. 그러고는 어영부영하다가 잃어버린 천국처럼 우리의 뒤에 있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며,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해 달라고 헛되이 소망한다. 그것은 악마가 최고의 현실적인 행복인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소망이라는 환영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론』 5장 쇼펜하우어
악마는 끊임없이 나를 불러냈다. 고통이 없는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행복의 환영을 그려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더 큰 집에 살아봐. 더 좋은 학교에 가봐. 더 좋은 옷이 있어. 맛나고 근사한 음식이 있어. 지금 가진 것은 형편없으니 다 버리고 뾰사시한 것으로 구입해 봐. 그러니 돈이 필요하니 열심히 벌어봐. 이렇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어. 좋은 세상이 있는데 왜 그렇게 살고 있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의 무용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많은 경우에 지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행복이 갖고 있지 않은 행복의 허상 때문에 손상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누리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하다. 그러나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는 자는 완전히 눈뜬장님이다.
『친화력』 괴테
더 좋은 것은 정말 좋은 것의 적이다
『프랑스 잠언』
더 좋은 것을 더 높은 것을 더 많은 것을 구하는, 그러니까 탐욕은 지금의 행복을 잠식했다. 모처럼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했다. 몇 달 동안 아주 힘들게 고생하며 나는 경제활동을 했다. 그게 내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피를 팔아 번 돈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돈을 벌었고, 무사히 마무리되어 함께 축하하고 위로하는 의미에서 친구들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한 친구는 마침 동네에 맛있는 파스타 집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모 호텔 요리사였던 분이 창업한 곳이라고 한다. 작은 식당인데 맛은 일품인데 가격은 착하다. 몇 가지 요리를 시키고 생맥주까지 한잔 했다. 내내 더운 날씨가 조금 누그러져 늦은 오후의 산책도 가능한 날씨였다. 바람이 불고, 친구들을 만나고, 거기다 맛난 음식을 먹었다.
아 이게 행복이다!!!
이전에 써놓은 글을 다시 보니 많이 생각이 오간다. 하필 어제 부주의로 발을 삐끗했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았지만 발등 상처부위가 파랗게 멍이 들었다. 냉찜질을 하고 압박붕대로 처치를 했지만 하루종일 피로도가 높아진다. 발 때문에 몇 달 내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또 발에 문제가 생겨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나마 이 고통이 생기기 전이 얼마나 행복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큰 고통의 상황이 생기면 지금의 상태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고통은 현실이고 살면서 크고 작은 고통을 만난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고통 없는 상태가 행복이라면 그저 별일 없는 소박한 하루가 행복이다. 크고 작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고통의 순간에 고통에 집중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리고 있는 것들에 집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발이 불편하여 하루의 계획, 일주일의 계획이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도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 그나마 다행이다. 더 크게 다치지 않아서"
" 발을 다쳤지만,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