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 당신을 추억합니다
1950년대--또다시 아이코노클라스트(iconoclast)의 깃발은 빛나야 한다.
무지몽매한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듯 고가(高價)한 우리 세대의 정신을 제물로 바치던 우울한 시대는 지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금 가고 낡고 퇴색해 버린 우상과 그 권위의 암벽을 향하여 마지막 거룩한 항거의 일시(一矢)를 쏘아야 할 때다.
우리는 조소한다. 고루와 편협을 자랑하는 아나크로니스트들의 가소로운 독백과 관중의 덧없는 박수 속에 '자기(自己)'와 '트릭'마저 상실해 버린 마술사의 비극을 조소한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 공허한 우상의 자태--그것은 우리 사색(思索)의 선혈을 흠씬 빨아먹고 교만한 웃음을 웃는 기생충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경(究竟) 낡은 유물은 그 낡은 구세대의 시간과 더불어 소진(消盡)되게 마련이며 혹은 박물관의 진열장 속에 정좌한 골동품으로서의 운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우상은 우리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다. 표피(表皮)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진의 광풍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그 거추장스러운 달팽이의 껍데기를 등에 지고 다닐 필요는 없다. 혈혈단신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작업을 개시해야 한다. 50유년의 신문학 시대 그것을 과도기나 초창기의 혼란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지루하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이 문학 선사 시대의 암흑기를 또다시 계승할 아무런 책임도 의욕도 느끼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로이 출발해야 될 전환기인 것이다. 우상을 파괴하라! 우리들은 슬픈 아이코노클라스트, 그리하여 아무래도 새로운 감격이, 비약이 있어야겠다.
-한국일보, 1956년 5월 6일
변호인: 이 소설이 반미적인가?
이어령: 이 소설은 하나의 상징이므로 찬미도 반미도 아니다.
변호인: 저항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어령: 문학은 본질적으로 저항이다. 아무리 평화 시대라도 작가는 저항성을 지닌다.
변호인: 북괴에 동조했다는 데 대해서는?
이어령: 작자는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장미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지 사람에게 담배 파이프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정현의 <분지>는 창작 과정의 꽃이다. 그가 만일 다른 의도로 썼다면 상징적, 우화적 수법이 아니라 준거가 확실한 리얼리즘 기법으로 썼을 것이다.
변호인: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놀랐다. 증인은 이 소설이 용공적이라 보지 않는가?
이어령: 나는 놀라지 않았다. 병풍 속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자는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자는 놀라지 않는다. <분지>는 소설이지 신문 기사가 아니다.
이어령: 불온한 작품이 서랍 속에 있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을 밖에 내놓을 때 비로소 그 문학은 참여하는 것이다. 봄이 오듯 영광된 사회는 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참여의 본질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자는 것이다.
김수영: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문화의 본질은 꿈을 추구하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말하는 오도된 참여론자들은 교정될 수 있는 일시적 현상이지만, 한번 상실한 정치적 자유는 쉽게 회복될 수 없다. 우리의 질서는 조종을 울리기 전에 벌써 죽어 있다.
서가에 꽂힌 책들, 그중 이 당돌하고도 무모한 모험을 하게 된 이유는 그 유명한 안데르센의 동화 「발가벗은 임금님」이 그런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군중이 만들어 낸 환상의 옷을 통해서만 임금님을 바라본다. 남들이 모두 떠들어 대니까 임금님이 발가벗은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잠자코 있다. 그러므로 임금님의 알몸을 발견한 것은 아이들의 눈이었고, 동시에 큰 소리로 그것을 말한 것도 아이들의 입이었다.
왜 문학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기도 하는데, 원고지에 쓰던 것을 잠실 주경기장으로 옮긴 것일 뿐이다 -이어령-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이다. 목수가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문화부의 네 기둥을 다 세워놓고 나는 떠난다. 그때 정말 이 집주인이 올 것이다
새해가 되면 떡국과 함께 나이(시간)도 마음도 새로 먹는다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디지털의 공허한 가상현실을 갈비처럼 뜯어먹을 수 있는 어금니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이버의 디지털 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파워가 2006년 희망의 키워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얼음의 돋보기 효과 때문이었는가. 유난히도 큰 금붕어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주전자에 물을 끓여왔고 나는 급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어항 속에 물을 쏟았다.
입김 같은 수증기가 올라오면서 어항이 숨 쉬는 소리를 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살얼음 사이에서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헛본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했던 것인데 정말 금붕어들은 꿈틀거리더니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잠든 사이 매서운 추위는 문고리도 흔들지 않고 내 신부의 방과 너희들의 어항을 침범했다. 얼어붙은 너희들을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우리가 한방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의 추위가 바로 너희들의 추위였다는 것. 나에겐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없지만 어항 속 겨울을 함께 숨 쉬고 있었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모르고 지내온 거다.
너희들 이름처럼 빛과 환희, 꽃피는 축제의 생명을 위해 오늘 아침 우리는 함께 겨울과 싸웠다. 그리고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났다. 한 주전자의 끓는 물이 온 방안의 냉기를 생기로 바꿨다. 미안하다. 절대로 다시는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겠다. 맹세 하마. 그리고 아내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건 내 아내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두고 하는 맹세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온 세상이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반짝이며 헤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언 잉크병이, 아내의 화장대와 방바닥에 벗어놓은 때 묻은 양말, 일상의 얼룩과 먼지들까지도 일제히 수면으로 떠올라 금붕어처럼 숨을 쉰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음과 생이 이마받이를 하는 전율의 순간, 추위를 밀어내면서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나는 어항인지 모태인지 모를 따뜻하고 조용한 공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기까지 한 그곳은 이미 10제곱미터의 단칸 셋방이 아니었다.
금붕어의 어항이 그것들이 태어난 강물과 바다로 이어지면서 지구 크기의 생명권으로 번져나간다.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