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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Mar 27. 2022

생일날에 장례식장에 가다

생명과 죽음의 맞닿음


          

태어난 날에 장례식장에 갔다. 친지의 죽음의 소식을 접했다. 별다른 애정이 없었던 사람이라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어디서 그 울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몸의 유한함에 대한 탄식인가? 그의 죽음을 보며 나를 보는 것에 대한 슬픔인가? 몸은 태어나고 언젠가 기능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한한 그 몸을 만수무강 신화에 대입시키려다 허무를 만나게 된다.    

  

어제는 안중근 열사가 순국한 날이다. 그는 외부세력에 의해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외부세력의 중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총을 겨눈다. 결국 국제재판을 받지만 5개월 만에 감옥에서 사형을 당한다. 죽음 직전에 많은 유묵을 남겼는데 그것은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킨다. 몸은 죽었지만 그 정신이 지금도 살아있다. 

     

유명인의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딸들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며 편하게 세상을 떠나신 것 같다. 개별적인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딸의 고백을 보면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는 분이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아버지라는 그 말은 그분의 육신이 떠나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한 죽음도 있다. 쓸쓸히 관계를 정리도 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며 떠나는 몸도 있다. 다양한 죽음 소식과 함께 생일날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한다. 몸뚱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다가오는 나이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질문이다.    




성경의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는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소개된다. 렘브란트의 그림으로도 묘사되어 유명하다. 내용의 얼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챙겨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다 결국 자신이 돌아갈 곳이 아버지 집이라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 / 렘브란트



집을 나가다 

     

무수히 떠난다. 집을 떠나고, 직장을 그만두고, 싱글을 그만두고 결혼을 하고, 결혼을 그만두고 싱글이 되고.. 우리는 끊임없이 찾고 찾는다. 자기 소유의 집이 생기면, 결혼을 해서 자녀가 생기면, 그 자녀가 좋은 교육을 받아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을 가지면, 연금이 있는 노후가 되면 그곳에 보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돌고 돈다.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빌 게이츠 조차 인생이 제대로 안 풀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시대를 호령하던 대통령도 금방 추락한다. 선망하던 대기업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훌훌 털고 내려와야 한다. 신기루 같은 그곳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다.      


누가복음 이야기 속의 둘째 아들은 자기의 몫을 챙겨 집을 나간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찾아 배회하지만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누구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비로소 아버지 집을 생각한다. 공간의 아버지 집이라는 관점을 조금 바꾸어 본다면 바로 자기 내면이다. 이미 자기 안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밖에서 찾으려 하니 이리저리 휘둘린다. 누구도 자기를 먹일 수 없다. 오직 자기만이 자기를 먹일 수 있다. 아버지 집은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허랑방탕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자기의 삶을 구축하겠다는 결의로 집을 나간다. 여기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는 즐거움도 찾고 실패도 경험한다. 좌충우돌이다. 그러나 결국 탕진한다. 가지고 있던 탄알을 다 쓴 병사처럼 빈 총만 남는다. 더 이상 비빌 곳이 없어지는 지점에 이른다. 구걸해보지만 쓸데없다. 그 시간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이미 모든 것은 아버지 집에 다 있었다.  

    

인생 역시 그런 것 같다. 여러 가지 시도. 그러나 그 너머에 신기루는 실체가 없이 사라진다. 다시 찾아오는 허무가 있다. 그러나 이건 누구도 가르쳐주지 못한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아야 한다.      


어디서도 찾지 못하다      


여기 말고 저기에 있을 것 같아 끊임없이 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하려고 한다. 좋은 집, 좋은 차, 명품, 좋은 학위,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정신적인 영적인 신기루도 있다. 좋은 깨달음. 좋은 각성, 해탈,..... 

그럼에도 목이 마르다면 그곳에 물이 없다는 말이다. 어디에도 물이 없다면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깨닫고 돌아오다 


그가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제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누가복음 15장 16절-17절     


벼랑 끝에서 둘째 아들은 스스로 깨닫는다. 아버지 집에 일꾼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 이미 충분한 것을 밖에서 찾으려 무진장 방황했음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향한다. 이미 내 안에 충분한 것을 밖에서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환대를 받는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장 24절     


몸뚱이의 불로장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몸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살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내 생명이 향하는 그 일을 하는 것만이 나로 살아가는 것이며,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죽어야 사는 것이다. 매일매일 질문하며 자신의 걸음을 내 디뎌야 한다. 바보처럼 자꾸 피하며 도망치던 걸음을 멈추고 이미 자기 안에 근원의 샘이 있음을 잊지 않으며 근원의 샘에서 터져 나오는 음성에 안테나를 맞추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 몸이 스러지더라도 내 생명의 영원함 속에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며 태어남에 경배를 올리는 순간이다.   

   

생일이 되면 요란한 축하를 받고 싶었던 시간과 달리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똑같은 해가 뜨고 변함없는 일상이 진행된다. 타인의 조촐한 축하를 받게 되면 또한 기쁜 일이다. 오늘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손수 장미 몇 단을 사서 집 여기저기 꽂아 두었다. 누군가의 축하를 받는 것도 좋지만 내가 축하를 해주고 싶다. 태어나서 애쓰며 살아온 시간들. 내가 나를 축하해주고 싶다. 

Happy Birthday to Me!!      






생일날에 죽음을 생각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니 오늘의 한 걸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사라질 신기루를 좇고 있는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몸뚱이가 사는 현실에서 땅에 발을 디디고 생존을 하려 애쓰고 있지만,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을 놓지 않고 살고 있는가? 죽어야 사는 신비를 경험하고 있는가?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살아있는 정신 그것을 만나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가?      


생일 며칠 전 사두었던 꽃이 벌써 시들고 있다 



책상에 꽂힌 꽃을 봅니다. 

벌써 어떤 녀석들은 시들어 고개를 숙입니다. 

언제가 나도 그렇게 사라지겠지요.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의 여정을 살아온 나를 돌아보며 

또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나의 나날들을 그려보며 

이 순간을 온전히 들이마십니다.      


생일날에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 

좋습니다. 

생일날에 자기를 위해 꽃을 사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모두의 나날은 죽음이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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