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중 기본 아닙니까. 회의록 쓸 때 내가 생각하는 것들.
고백하자면 나는 회의록에 있어서는 프로페셔널이여야 한다. 왜냐면, 직장생활 내내 각종 회의록 쓰는 일을 도맡아 해 왔으니까.
하지만 회의록 작성처럼 지루한 업무가 있을까? 또 하나 고백하건대 회의록 작성은 제일 증오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나의 지난 8년 직장인 생활 중 가장 시간 아까운 업무 베스트, 막내에게 떠넘기고 싶은 업무 베스트를 꼽을 영광을 내게 주신다면 그 상을 냉큼 회의록 작성님께 드리고 싶다. 남들은 한 번 듣고 다음 업무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나 홀로 남아 제대로 못 들은 기술용어들을 구글링 해보고, 빠트린 내용은 없는지 녹취까지 풀어가며 회의록에 매달리고 있었던 나의 세월들이여... (부들부들)
내부 회의록에서부터 영문 회의록, 공공기관 제출용 회의록까지. 과연 누군가 다시 들춰 읽기는 할까 싶은 회의록에 나는 내 청춘을 쏟았다. (3g 정도) 그 사실이 언제나 안타깝곤 했는데, 얼마 전 그 생각에 전환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이 회사로 이직을 하고 무려 4개월 만에 첫 프로젝트를 배정받게 되었다. 새로 알게 되어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하며 지내던 차에 첫 팀 회의가 열렸다. 팀원 각자 데이터 구조를 들여다보며 파악한 시스템에 대한 특징에 대해 나누고, 데이터 구조상의 문제점이나 분석 시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캐주얼한 자리였다. 그런데 첫 회의라 그런가. 회의가 무한정 길어지기 시작했다. (다들 넘치는 고민으로 할 말 많음.) 회의가 오후로 넘어가자 팀장님께서 회의 내용을 정리해 공유해달라고 요청하셨다.
회의록 쓸 사람은 누구? 말해 뭐 해, 나지 나.
8년 차도 여전히 주니어인 IT 컨설팅의 세계. (참 좋다.)
대부분의 업무 회의에 메모를 열심히 해두는 편이지만, 나만 볼 기록과 공유할 기록은 엄연히 다르기에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만의 회의록을 모두의 회의록으로 다시 정리했다. 아무리 내부적으로만 돌려보게 될 문서였지만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작성해 공유하는 문서이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더 쓰였다. 증오하는 회의록 쓰기라지만 나는 뭐든 잘하고,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니까.
나는 회의록을 쓸 때 생각을 많이 한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하고, 회의장에서 나와서도 생각을 한다.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지, 나눠보려고 한다. 나는 네 가지 정도를 생각한다.
• 어떤 기관이 참석하나?
• 참석자의 직급은 어떠한가?
• 참석자 간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나?
회의에 어떤 사람이 참석하는지, 직급은 어떠한지를 가장 먼저 살핀다. 기관별로 회의에 부여하고 있는 중요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기관이 왜 참석했는지를 사전에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단순히 청취하기 위함인지, 확인사항이 있어서인지, 의견을 내기 위함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어떤 말이 기록에 남겨야 할 중요한 말인지 판단할 수 있다.
• 보고회: 정보전달 목적의 회의
• 의사결정: 논의가 필요한 아젠다가 있는 회의
• 계획 수립: 업무 계획을 결정하는 회의
• 인터뷰: 사실관계 확인/파악, 요구사항 청취 등을 위한 회의
보고회는 보통 발표자료가 작성되어 있고, 발표자료의 내용이 보고회 시간을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고 생각해 발표자의 발표 내용만 빠짐없이 적어서는 안 된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보고회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이나 추가요청 사항이다.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는 으레 참석자 간에 의견을 모아야만 다음 액션을 시작할 수 있을 때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아젠다가 있고, 이 아젠다에 대한 사전 이해를 갖추고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의사결정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론까지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이다. 결정사항 및 결정까지의 흐름을 논리적으로 작성한다.
계획 수립 회의는 업무 계획을 결정하는 회의이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언제까지 하기로 했는가가 회의록에 명확하게 나타나야 한다. 마일스톤 별 세부적인 수행 활동 및 일정 중점으로 작성한다.
인터뷰는 질문자와 답변자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보통 문서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뷰가 행해지는 만큼, 질의에 대한 답변을 최대한 세부적으로 옮겨 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답변의 핵심이 무엇인지 요약까지 하면 완벽하다.
• 사실의 기록
• 회의 결과 공유
• 보고자료의 기반
목적 없는 회의 없듯, 목적 없는 회의록도 없다. 회의록 작성 목적에 따라서 시각을 달리 해야 한다. 증거 자료처럼 사용하기 위한 기록형 회의록(나중에 말 바꾸기 금지)이 있고,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해관계자에게 회의 중점 사항을 공유하기 위한 회의록(나중에 딴말하기 금지)도 있다.
사실의 기록형 회의록을 작성할 때면 나는 되도록 시간 순으로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를 충실하게 적는다. 이런 증적형 회의록을 적는 경우, 대부분 업무 상 날 서 있고, 민감한 때가 많기 때문에 의도가 담긴 말의 뉘앙스를 자의적으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회의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참석자들의 언성이 높아진다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 분위기와 감정까지 회의록에 담을 필요는 없다. 의미에 집중한다.
회의 결과 공유를 위한 회의록 작성 시에는 참석기관별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빠뜨리지 않고 적으려고 한다. 어떤 한 주제에 대해서 실제 발화는 A기관에서 90%를 했다고 하더라도, B기관과 C기관의 입장을 보여줄 수 있는 말을 모두 담아 적으려고 한다. 단 한 글자의 '네'라도 말이다.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회의장의 분위기를 모르므로, 모든 참석기관의 의견이 다 담겨 있지 않으면 회의록에 누락됐다거나 작성자의 시각이 편중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내가 생각했을 때 가장 어려운 건 보고자료의 기반이 되는 회의록의 작성이다. 기관별로 끌고 나가고 싶은 방향이 다를 때 특히나 어렵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완전무결하게 회의록을 작성하지 못했다가는 '그때 그분이 이런 말을 했었나요? 빼주세요.' (다 같이 들었는데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넣어주세요.' (그럼 당신이 적은 거라도 줘...) 등과 같은 시정 요구가 쏟아진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적당히 둥글고도 적당히 뾰족하게 써야 한다. (부들부들)
회의의 목적과 추후 작성해야 할 보고자료의 목적이 다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회의를 소집했던 주목적은 행사 계획 때문이었지만 회의를 하다 보니 잠시 타 부서의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하자. 나는 우리 팀 업무와 무관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행사 계획 이야기만 회의록에 적었는데, 다른 팀에서는 내년도 사업계획을 빌드업할 목적으로 내게 회의록을 공유 요청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기다려서 받은 회의록에 사업계획 이야기가 빠져 있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회의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문서들에 대해 인지하고 회의록을 써야 한다.
회의록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한 말을 옮겨 적는 것이라지만, 그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적어서는 훌륭한 기록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제대로 요약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 말솜씨를 과대평가한다. 과감 없이 그대로 적었다가는 나중에 도착한 회의록을 읽고 어떤 사람은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때로는 화를 내낼 수도 있다. (말주변이 없는 본인이 아니라 회의록 작성자인 나에게..) '내가 언제 이렇게 말했어!' 분명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렇게 적지는 말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써주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위 네 가지를 골똘히 고민해 볼 필요가 없는 회의록도 많다. 이날 나는 팀 회의에 대한 wrap-up 자료로써 캐주얼한 회의록을 쓰면 됐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그냥 그렇게 했다. 각자 맡은 범위에 대한 논의는 개개인이 충실히 듣고 기록을 남겼을 테니, 팀원 전체가 공통적으로 remind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해 작성했다. 분석 시 중점사항에 대해 두서없이 오고 간 내용들을 아이템별로 나누어 분류하고, 분석서 작성 시 통일하기로 한 작도법은 의사결정에 가까우니 별도로 모아 다른 꼭지로 썼다. 말미에는 향후 일정 계획을 정리해 다들 참조해서 누락 없이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빠르게 회의록을 공유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회의록의 조건 중 하나는 신속함이다. 다들 회의 내용이 신선하게 남아있을 때, 잊히기 전에 보내야 풍성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기도 하다. 이 조직에 와서 처음 써보는 회의록을 메일로 보내놓고, 두근두근 했다. 너무 길다거나, 빠진 게 있다고 하시면 어쩌나.
기다려도 피드백은 오지 않았다. 크게 맘에 드는 것도, 거슬리시는 것도 없었나 보다. 중요한 회의는 아니었으니까, 뭐. 그렇게 나는 그 회의록에 대해 잊었다. 그렇게 다 잊고 산지 일주일쯤 지났던가. 팀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 팀장님이 회의록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 아닌가. (아... 내가 회의록도 썼었지.) 다른 게 아니라, 내 회의록을 보고 너무 놀라셨다는 것이었다.
회의록을 어떻게 그렇게 잘 쓸 수 있어? 정말 다시 봤어
회의록을 읽는데, 회의 내용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셨다고 했다. (ㅋㅋㅋ) (제 회의록이 무슨 저세상길이냐고요.)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이제 8년차인데, 회의록처럼 짜치는 일로 이렇게 칭찬을 받다니.
그 작은 칭찬에 맘이 녹는다. 내가 회의록 작성에 보냈던 그 쓰고 지루한 시간들이 허송세월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회의록을 쓰던 내 모든 시간은 항상 급박하고 필사적이었다. 최선을 다해 경청하는 시간이었고, 경청을 넘어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간이었고, 말 한마디를 넘어 맥락을 좇아가기 위한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내게 참 도움이 되는 업무였다.
회의록 작성이 너무 지겨운 분들께, 이야기드리고 싶다. 누군가의 말 뒤에 웅크리고 있는 의중을 벗겨 단단하게 써내는 작업을 해볼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중요한데 누락된 이야기는 없는지, 생략해도 좋을 부분은 없을지 이곳저곳에 피드백을 부탁하며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를 느껴보고 즐기시라고. 결국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커뮤니케이션이고, 좋은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은 굿 리스너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회의록 쓰기는 경청의 시작과 끝과 같은 일이다. 나는 여기에 보낸 시간들의 의미를 알고 감사히 여기게 되기까지 8년이 걸렸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그러지 않으셨음 하고 바라본다. 회의록 쓰기, 재미없지만 값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