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선생님을 떠날 수는 없었던 거야
오늘은 오늘은 선생님을 만나는 목요일. 진료를 위해 연차를 내두었는데 진료만으로 휴일을 다 보내기가 아쉬워 부지런을 떨어 미술관을 다녀왔다. 개관 시간에 맞추어 전시 관람을 시작했는데 금방 진료 시간이 다가와서 허둥허둥 병원으로 향했다. 20년째 같은 병원을 다니고 있으니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자주 길을 헤맨다. 오늘은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탔다. 에라이. 이러다 늦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진료는 언제나 예약시간보다 2-30분 지연되고는 하지만, 막상 예약시간보다 늦게 도착할 것 같은 예감이 들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지하철 입구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가야할 곳은 3번 출구. 자연스레 내 발길이 이끌던 곳과는 반대 방향이군. 재빨리 방향을 튼다. 내 길눈은 어째서 이렇게 어두운 걸까.
역에서 나오자 익숙한 냄새가 훅 끼쳐온다. 찐 옥수수와 군밤, 은행을 굽는 은행냄새.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간식거리를 팔고 있는 상인들 덕분에 늘 같은 냄새가 난다. 낯익은 냄새에 이제야 안심이 된다. 이게 팔리나, 걱정스러우면서도 막상 사 먹어본 적은 없다.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이 든 나무들과 병원 건물도 반갑다. 오늘은 가래떡 굽는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사 먹어 본적도 없는 가래떡이 보이지 않으니 어쩐지 아쉬운 이 마음은 뭘까. 주제 넘게.
씩씩한 걸음으로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며 씩씩하지 못한 표정을 짓는다. 오늘도 어린이병원 표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어린이병원이 어디로 도망갔을 리도 없는데 이 자리에 서면 의심도, 겁도 많은 어린이의 마음이 된다. 맞게 가고 있는 거겠지? 길 잃는 거 아니겠지?
표지들을 따라 외래진료실에 다다랐다. 벌써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인데 나는 아직도 어린이병원에 다니고 있다.
어린이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던 건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날부터 점차 눈을 뜨기가 힘겨워졌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몇 살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정말 어릴 때였다. 얼마나 어렸던지 눈꺼풀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는 외적 변화 하나를 감당하기 힘든 어린 마음들이었다. 외모 변화가 우정을 깨뜨릴 수 있을만큼 순진하고 여리던 마음들이었다. 아이들은 때로 너무 솔직하고, 그래서 잔인하다. 힘없는 눈꺼풀이 드리워진 내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나를 꺼리는 아이들 사이에 억지로 자리하느니 혼자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어린아이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생각은 동네의원, 소아과, 안과, 여러 2차 병원을 전전하다 여기 이 어린이병원에 당도해 선생님께 정확한 병명을 듣고 난 뒤로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병명이 밝혀졌다고 내 외톨이 세상이 하루아침에 반짝하고 떠들썩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치료는 돌을 닦는 작업과 같이 지루하고 더뎠다.
선생님과 돌을 닦으며 떠나보낸 강산과 같은 세월이 벌써 둘. 이십 년. 그간 나는 이런저런 약물치료로 달덩이 같은 얼굴로도 지내보고, 털북숭이도 되어보았다. 복약 치료로도 차도가 없었고 나는 여전히 잠으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멍텅한 눈을 하고 지내야했다. 사람들과 눈 맞춤을 피해 땅을 보며 보낸 유년은 참 괴로운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내게 개흉 수술이라는 하나의 희망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나는 가슴을 열어서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다면 당장에 그러고 싶었다. 참 재밌게도 선생님은 내게 보여준 희망만큼 인내도 요구했다.
"가슴은 맨 마지막에 여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아마 선생님은 내게 개흉수술을 해줄 마음이 없으셨을 것이다. 위험한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 흔적이 평생 남을 수술이었다. 다만, 내게 기댈 수 있는 희망을 하나 주고 싶으셨겠지. 어린 마음에 괴로움을 품고도 덤덤히 지낼 수 있던 것은 선생님이 보여준 실낱 같은 희망 덕분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바라볼 수 없는 삶이 참지 못하게 싫어지면 마지막으로 가슴이라도 열어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기다리다 대학생이 되었다. 선생님은 흰머리가 생겼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선생님을 떠나지 못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나를 어린이병원에서 맞아주셨다. 어느 날은 선생님께 대뜸 긴 해외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너는 참 나를 힘들게 해'라면서도 정성껏 영문 진단서를 써주셨다. 나는 그 진단서를 읽어보며 처음으로 내가 그저 네, 네하고 받아먹었던 약들이 어떤 의도의 시도였는지, 내 병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나의 치료는 '축하해'와 같은 말로 깔끔히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는,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제시각에 도착한 어린이병원의 외래 진료실. 시끌시끌한 소리들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소음은 활기와 다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우렁차게 소리치거나 귀 찢어지게 울지 않는다. 칭얼거림과 우물거림들. 지쳐있지만 웃는 아이는 가끔. 소리 죽여 우는 보호자도 가끔. 가끔 본다. 아이들 속에 가만히 앉아서 차례를 기다린다. 이제 나는 환자라기보다 보호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내게는 아이의 모습도, 아이의 소란도 남아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더 이상 이 아이들만큼 아프지 않다.
오늘따라 앉은자리가 불편하다. 사실 결심해 둔 게 있어서이기도 하다. 어린이병원에서 일반 외래로 진료를 옮기겠단 말을 선생님께 드리기로 했다. 오늘은 꼭. 기필코!. 결심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건 어린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아픈 아이들'이 이제는 아주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아이들보다 아프지도 않았고, 그 이전에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한참 전에 어른이 되었지.) 아이들에게 아이들의 선생님을 드리는 게 맞았다. 선생님의 시간은 아이들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간 선생님을 떠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내 불안과 욕심 때문이었다. 선생님께는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궁리가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OO이 들어오세요'가 아니라 'OO씨 들어오세요'라는 부름. 그 부름이 나의 결심을 더 단단하게 한다. 떠나야 해. 바로 오늘.
진료실에 들어서자 언제나와 같은 모습의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조금 더 작아지신 것 같기도. 사실 내가 선생님을 대면하는 진료 시간은 1분 남짓. 오고 가는 말도 늘 똑같다.
"좋아 보이네."
"임신 계획은 여전히 없니?"
"그래. 컨디션이 괜찮은 날은 약 조절해 봐."
"6개월 뒤에 보자."
언제나 '네'로만 답하던 내가 오늘은 큼큼거리며 한마디를 보탰다. 선생님, 제가 이제는 일반 외래로 진료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고 말을 이어가려는데, 선생님이 잽싸게 말을 잡아채셨다.
"왜? 이제 어린이병동 오기 쑥스럽니?"
ㅡ 어.. 아니요, 그것보다는..
"어린이병원이 너무 시끄럽지? 그래, 나 일반 외래도 보거든. 우리 다음엔 거기서 보자."
ㅡ 어어.. 네.
이런. 나는 선생님이 어린이 환자만 보시는 줄로 알고 어린이병원을 떠나면 선생님과도 안녕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일반 외래도 보고 계셨다. 성인반도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병원을 떠나도 선생님과 계속 진료를 볼 수 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누를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안도의 미소가.
후련한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서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촉촉한 미소 담뿍 담아 작별인사를 해주셨다. 병으로 괴로워하던 어린이가 다 커서 (아직 병들었지만) 떠나는 모습이 감격스러우신가.
"에구. 가시는구나.. 조심히 가요. 거기는 환자도 적고 조용할 거예요."
아니요.. 선생님... 그게 제가 시끄러워서 떠나는 게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