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무리해 보면서 이런 정리, 저런 다짐, 이것저것 끄적여 보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끝장을 보지 못했다. 사진첩 정리도, 올해 최고의 책에 대한 코멘트도, 올해의 베스트 사건도 꼽아보다 말았다. (아이고 귀찮아) 올해의 경험들 중 정말 무언가 꼭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을 남겨야 좋을까? 나는 내가 올 한해 받았던 긍정적 피드백들, 그러니까 칭찬의 말들을 남겨보기로 했다. 내가 힘들 때 일으켜 세워주고, 길을 잃었을 때 빛이 되어줄 말은 아무래도 칭찬의 말들이니까.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해였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커뮤니티를 누비며 나를 소개하고, 보여주고, 녹아들며 보냈다. 그래서 그런가? "H 씨는 OO 하시네요." 식의 말을 가장 많이 들은 해이기도 했다. 오랜 지인과 친구들이 들려준 칭찬들도 풍성하다. 코 쓱 부비며 "에이, 아닙니다"하며 겸손 떨고 황급히 이야기 주제를 넘겼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헤벌쭉, 그 황송함과 감사함을 오래도록 곱씹고는 했다.
그 온기와 힘을 오래도록 가져가고 싶다.
칭찬 메뉴는 세 개를 준비했다. 약소하지만 세 개면 충분히 배불리 2024년을 먹고살 것 같다.
올해 가장 큰 조바심은 업무 적응이었다. 이직과 함께 업무 분야가 현격하게 달라지면서 적응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현직장 기술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지라 온갖 걱정을 사서 하며 긴 밤을 보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시간 내에 못하면 어쩌지? 상식도 없이 입사했다는 인상을 갖지는 않을까? 풀링제(프로젝트별로 팀이 꾸려지고 담당자가 어사인 되는 방식)로 돌아가는 컨설팅 조직 특성상 평판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부족함을 기꺼이 채워주는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내가 헤맬 때는 척척 도와주고, 내 의견과 결과물을 세심히 살펴주는 동료들 덕분에 앞으로 어떤 점을 보완해 나가야 할지와 내가 팀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일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스스로 잡다한 것이라 치부해 왔던 스킬들에 대한 평이 놀랍도록 긍정적이었다. 데이터 업무 경험에 있어서는 몹시 부족하다는 생각만 해왔는데, 문서화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나에게 배울 점이 많다며 같이 일할 기회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이 핑 돌았다. 네가 아직 이 직무가 요구하는 모든 스킬 셋을 다 갖추지 못했어도, 그건 우리가 백업할 수 있는 일이고 너는 너만의 특기가 있다는 말로 들렸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이 확실한 사람들만이 해줄 수 있는 칭찬이기에 그 멋짐에 반하기도 했다. 저를 품고 인내해 주실 자신이 있으시군요... (감동)
세상을 구하는 게 귀여움이라면, 회사를 구하는 건 유머라고 말하고 싶다. 웃으면 복이 와서가 아니라 웃는다는 건 일이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이 앞뒤가 뒤바뀐 듯한 철학은 B 박사님께 배웠다. B 박사님은 성공적 발표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는데, 참석자들을 한 번이라도 빵 터뜨렸다면 그 발표는 성공적 발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첫째, 참석자들이 발표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만 빵 터질 수 있다.
둘째, 참석자들이 발표자에게 호의적이어야만 빵 터질 수 있다.
셋째, 빵 터지고 나면 그나마 있던 적대감이나 긴장감이 풀어질 수 있다.
결국 빵 터진 발표는 청중의 주의력과 호감, 편안함을 모두 얻었으므로 성공적 발표다.
그 이후로 나는 회의의 콘텐츠뿐 아니라 장내 분위기도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유머의 힘은 대단하다. 웃음은 어색함이나 날섬을 즉각적으로 풀어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농담에 크게 웃고, 이따금씩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어떤 대화이든지 웃음을 곁들이면 더 유익해진다. 일 이야기도 웃으면서 해야 한다. 웃으면서 하는 일 이야기가 진짜 일 이야기 다운 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칭찬이 더 반가웠다. 어떤 구성으로 사람들이 모이든지 내가 없으면 덜 웃게 되는 것 같다고, 언제나 좋은 에너지와 분위기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감사말은 올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말이었다.
이전까지는 "참 성실해", "진짜 부지런해", "항상 긍정적이야"와 같이 단편적인 평을 들었었다. 같은 맥락이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올해 들어서 갑작스레 "좋은 영향을 많이 받는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된 것이다. 나는 이 변화가 참 놀랍다. 왜냐면 "너는 ~한 사람이구나"라는 평가나 감탄은 이야기의 대상이 오로지 상대방 한 사람으로 한정되지만, "좋은 영향을 많이 받는다"라는 진술에는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너'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걸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라고는 할 수 없다. 내 생활 루틴이나 언어적 습관, 태도가 더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과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고, 뭔가를 깨달았다거나 새로운 실천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바뀐 점이라면, 내 생활이나 생각을 드러내놓을 공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브런치에 글을 남기고, 커뮤니티(동호회나 스터디)에서 내 경험을 공유하는 일들을 했다. 드러내지 않았던 것들을 꺼내놓으면서 보이지 않던 연결점들이 도드라졌나 보다. 나에게서 자신과 같은 욕심과 욕망을 본 것 같다. 그러니 그들이 내게 받은 것은 영향이 아니라 공감이다.
이 세 마디만으로도 한해의 귀중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내년을 맞을 용기가 솟는다. 내년 바람이 있다면 나도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든든한 한마디를 남겨주고 싶다.
1. 표지 사진 Pexels @Karolina Grabowska https://www.pexels.com/ko-kr/photo/5706037/
2. 본문 사진 Pexels @Karolina Grabowska https://www.pexels.com/ko-kr/photo/5713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