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리서치, SQL퀴즈, 스터디, 전시 공모, 방송대, 북클럽, 글쓰기
근래 한 달을 허덕거리며 지냈다. 원래 하던 것들도 많았는데, 더 하고 싶은 일들도 생기고, 새로 맡게 된 일들도 있고... 할 일이 늘다보니 데드라인에 맞춰서 하나를 끝내면 곧장 다른 마일스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 하나를 끝내면 다른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고, 틈틈이 무언가 하고 있어야만 다음 일을 차질 없이 해낼 수 있는 한 달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캘린더는 이런저런 듀데이트 기록으로 빼곡하고 일기장은 텅 비어 있다. 바쁘면 아무래도 조용히 앉아서 기록을 할 시간이 없다. 진짜 바쁘게 살았던 때를 되짚어볼 때 남겨둔 기록이 없으면 묘한 허망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니 잠시 여유로움이 찾아들었을 때 일기를 남겨 본다.
이런저런 이유로 본사 생활 기간 동안 기술 트렌드 리서치를 하게 됐다. 이런저런 이유라고 하니까 엄청 중요하고 많은 이유가 있었다는 뉘앙스 같지만 그런 건 아니다. 이 작업이 지금 이 회사에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가진 이유와, 그 작업을 내가 맡기로 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유가 조금 달랐기 때문에 뭉뚱그려서 이런저런 이유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이유라면 나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작업 같았다. 이 작업에 필요한 스킬을 대체로 잘 갖추고 있었고, 리서치에서 요구하는 얕고 넓은 시야도 익숙한 것이었다. 무리 없이 잘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너무 익숙한 툴과 뷰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시작도 전에 권태감이 느껴지는 게 우려되는 바였지만 함께 일해 볼 기회가 없었던 새로운 리드분께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게 내 이유였다. 내 능력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면서도 새로 접할 수 있는 게 있다는 점.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기간이었다. 처음 리서치 수행 기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담당 리드는 두 달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었다. 두 달? 두 달은 내게 너무 길었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본사에서 체류하는 기간을 최소화하고 싶었기에 2개월짜리 작업에 매어있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작업 계획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한 달 내로 결과물을 내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에 맞추어서 작업을 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나는 본사에서 작업을 하면 됐지만 리서치를 리드해 주시는 분은 다른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계셨기 때문에 정기 리뷰를 하기 쉽지 않았다. 함께 협의해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8시에 리뷰를 진행했다.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이미 많던 때라서 일주일 두 시간의 침범도 내게는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원으로 늘어질 수 있는 저녁 시간 리뷰보다야 끊어야 할 시간이 명확하게 있는 아침이 나았다.
주어진 기간이 넉넉하지는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다. 걱정 때문에 근무시간 외로도 관련 아티클을 읽는다거나 작성 구조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내일은 이 내용을 추가해야겠다.', '여기에서 아티클을 더 찾아 읽어봐야겠다.', '내일 리뷰 전에 이 부분을 좀 더 보완해 둬야겠는데.'와 같이... 다행히 한 달 동안 큰 변고 없이 진행되어 리서치 자료 작성은 잘 마쳤다.
모든 게 의도와 계획대로 진행되었는데 아쉬움도 있다. 나는 좀 더 demanding한 요구에 시달릴 줄 알았고, 그것을 은근히 고대했던 것 같다. 예상과 달리 모든 게 순탄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 (물론 최선을 다했음.)
본사에서 진행된 SQL 퀴즈에 참여했다. 다른 팀의 내부 스터디였는데 따로 부탁을 드리고 참여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지난번에 글을 한 번 남긴 적이 있어서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관련 글: 알려주려는 손이 넘치는 본사 생활)
매일 한 문제씩을 풀이해야 했는데 나는 한 문제당 1-2시간씩은 걸렸던 것 같다. 풀이 설명까지 준비하려다 보니 많은 시간이 들어서 성실히 하루 한 문제씩 풀이하기보다는 주말에 몰아서 처리했다. 실무와 연결되는 문제들을 출제해주셔서 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SQL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배움이 있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더 크게 얻었던 것 같다. 나의 부족함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조바심 때문에 도움을 청했던 것이고 그 사실을 나는 무척이나 부끄럽게 여겼더랬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시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선량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반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잘' 받을 수 있는 팀원이 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어쩌면 당연하다. 조직 안에서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언제나 Giver의 역할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도움을 받았을 때보다 남을 도왔을 때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All-rounder가 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주변에 도움 구할 줄도 알고 그에 맞는 감사함을 표할 수 있다면 현명한 직장인이 아닐까.
입사 이후로 동기들과 계속해서 스터디를 이어나가고 있다. 매주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꼴로 차례가 돌아오는데, 부지런히 준비해두지 않으면 꽤나 부담이 된다.
이번에는 오라클 아키텍처와 성능 관련된 책 세 권을 선정해서 분량을 정해두고 차근차근 진행해나가고 있다. 그저 읽기만 해도 오래 걸리는데 요약해서 동기들에게 발표까지 해야 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미뤄두면 수습하기 힘든 상태가 되고는 했다. 그래서 꾸준히 읽고 정리하고 해야 해서 정말 쉽지 않았다.
사내에는 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스터디가 몇 개 있다. (동기 스터디는 비공식 비공개 비정규 모임이다.) 사실 주니어들은 참석만 하면 되어서 시간만 내면 되는 활동이긴 한데 이번 분기 모임은 몸을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었다. 주말 하루라도 집 안에서 뒹굴고 싶고, 마침 모임 날에 이 모임 말고는 다른 외부 일정이 없어서 못 들은 척, 바쁜 척하고 빼먹고 싶었다. 심지어 주제도 딱히 궁금하지 않은 분야이고. 그래도 나가면 재미있을 거야....... 나간 김에 카페 가서 책이라도 읽고 오자....... 스스로를 억지로 다독이며 나갔었다. 프로젝트에 나가 계셔서 잘 볼 수 없는 얼굴들도 보고, 발제도 재밌게 듣고, 밥도 맛있게 먹고 왔다. 근데 이 주에 정말 너무 피로했는지 모임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쓰러져서 잤다. 그래도 나가길 잘했어....
스터디장님께서 올해부터는 온라인 스터디로 모임 횟수를 늘리실 계획이라고 하셨다. 지금 내 일정 상으로는 절대 참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참여하고 싶어서 어떻게 일정을 정리해두어야 할까 고민이 된다. 무엇을 뺄 것인가. 이번 달 경험으로 미뤄보건대 지금은 무언가를 내려놓지 않으면 뭘 더 얹을 수가 없는 상태다.
개인적이라고 하기에는 일과 관련된 것들이 많아서 꼭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만은 또 없는... 그런 어정쩡한 나의 회사 밖 생활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다.
오늘 글 쓰다가 깨닫게 되었는데, 지금 발 걸치고 있는 북클럽이 네 개다. 여태까지 세 개인 줄 알았어.... 그런데 네 개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냥... 뭐랄까. 각기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차밍 포인트들이 있다.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모여 운영하고 있는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다. 돌아가며 책 후보를 추천하고, 멤버들의 투표를 거쳐서 이달의 책을 선정해 읽고 모여서 이야기한다. 같은 회사 동료들끼리 모여있는 모임이지만 다들 사는 지역과 일하는 지역이 다르다 보니 온라인으로 모임을 하고 있다. 북클럽이 아니라면 나누지 못할 대화 주제들이 오고 가면서 동료들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접하게 된다.
오래오래 전에 뮤직 페스티벌 스태프로 일하다가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 가입하게 된 북클럽이다. 원래 시초는 대학 친구들끼리 만든 북클럽이었는데 이제 창설 10주년이 넘었고, 세월과 함께 새로운 멤버들이 초대되면서 이제는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북클럽이 되었다. 목적의식이나 주제가 뚜렷한 읽기를 하는 모임은 아니지만 몇 년째 매달 만나다 보니 애정하게 된 북클럽이다.
별도의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어 관리하고 있을 정도로 애정하는 북클럽이다. (관련 매거진: 함께 읽기 - 보이지 않는 세계들) 제3세계로 뭉개져 일컬어지고는 하는 우리들 관심 밖 세계의 문학을 찾아 읽는, 일종의 문학 탐험가들이 모여있는 모임이다. 아시아와 남미 문학을 거쳐서 지금은 중동 문학을 함께 읽고 있다. 하나의 지역을 여행할 때면 2주에 한 권씩 3개월 정도를 밀도 있게 읽고 나머지 기간은 쉰다. 중동 세션이 거의 끝나간다. 일요일 아침에 온라인 모임을 해서 일정을 맞추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격주에 한 권씩 책을 읽어야 해서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언제나 완독 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걱정이 있다면 지금 모임 후기 글이 많이 밀려있어서... 여유가 생기면 틈틈이 써 나가야겠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중 가장 인지도와 인기가 높은 건 아마 민음사 북클럽이 아닐까? 하지만 민음사의 책은 워낙 자주 사서 읽기도 하고, 유난하게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다. 반면에 마음산책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응원하고 싶다. 북클럽 회원이 되면 분기별로 신간을 보내주고 북토크 등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책을 받아본 지 꽤 되어서 깜깜이 잊고 있었는데 언제나 좋은 책과 이야기 자리를 만들어주시는 멋진 북클럽이다.
이렇게 네 개의 북클럽을 하다 보니 북클럽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의 양만 한 달 네 권이다. 평상시 내 독서 속도가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이니, 북클럽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독서량이 꽉 차고 만다. 독서 생활에 가장 부담이 되는 건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세계들>인데 이번 주를 끝으로 중동 세션이 마무리되니 다음 주부터는 읽고 싶던 책을 읽을 시간이 생길 것 같다...! 얼마 만에 스스로 골라 읽는 책인가... 몹시 감격스럽다.
<프로젝트 해시태그>라는 전시 프로젝트를 들어본 적 있을지? 나는 없었다. <글또>와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통해서 알게 된 <프로젝트 해시태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차의 지원으로 매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분야 간 융합을 지향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젝트인데, 한 분과 뜻이 맞아 이번 공모에 함께 지원해기로 했다.
이 전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차였는데 작년 프로젝트의 전시를 아직 하고 있을 때라, 오후 반차를 내고 전시를 보러 다녀오기도 했다.
미술관 탐방 때에는 사실 <프로젝트 해시태그> 전시보다는 <올해의 작가> 전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권병준 작가의 로봇에 관한 전시였는데 정말 큰 감명을 받았다(이 전시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남기고 싶다). 우리는 어떤 전시를 꿈꿀 수 있을까?
우리들끼리 공모 지원에 대한 결기를 다졌을 때엔 이미 프로젝트 공모가 이미 진행 중이어서, 지원서에 대한 기획이나 방향에 대해 충분히 토의하고 숙고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모자랐다. 그래도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이번 기회를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기로 했다.
매주 퇴근 후에 서울역 인근의 한 카페에 모여 앉아서 아이디어를 던져보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하는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인공지능이나 UX 분야에서 하고 있는 고민들이나 표현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들을 때 너무 흥미롭고 재밌었다. 종종 결과와 상관없이 이 시간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말을 나누며 즐겁게 작업했다. 짜임새나 흐름에 있어서 One Team, One Art로서 불완전하지만 작품 계획서도 무사히 작성해 지원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모였던 날 서울역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이렇게 성공과 실패가 모호한, 어떤 결과를 받게 되든 만족스러울 작업은 처음 해본 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어주던 팀원은 자신은 좋아하는 일만을 해와서 이렇게 '언제나 이기는' 작업에 익숙하다고 했다. 어쩜. 그는 아주 현명한 인생을 살고 있구나. 그나저나 우리 이번에 당선되어도 큰일이라며... 후련함과 설렘과 괜한 근심의 마음을 담아 안녕했다.
불현듯이 수학 공부가 다시 하고 싶어 져서 방송통신대학교 통계·데이터과학과로 편입학을 했다. 주변에서는 대학원을 가지 왜 또 학사를 하냐는 반응인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인생도 긴데 관련 학사 공부부터 천천히 하고 석사는 그다음에 해도 되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 지원을 받고 직장 병행으로 한국에서 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는 사실 나중에 직장 다니기 싫어지면 공부하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에... 그런데 데이터 분야로 해외 대학원에 지원하려면 공학사가 필요한 학교가 대부분이길래 겸사겸사 시작했다.
분명 입학신청을 할 때에는 통계학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수강신청하고 보니 이산수학, 인공지능, 데이터베이스시스템 등 컴퓨터공학 과목을 더 많이 신청했다. 3월에 개강한 이후로 틈틈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4월이 되면서 출석수업에도 참여하고 과제도 해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어찌어찌해 왔고 이제는 온라인 강의 수강을 더 부지런히 해야 할 타이밍인데 여전히 시간이 없어서 걱정 중이다. 어찌 되겠지...
커피챗들이라고 쓰다가 고쳐 적는다. 알콜챗들. 술이 빠진 적이 없으므로...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통로로 만난 사람들도 있고, <글또>를 통로로 만난 사람들도 있다. 공통점이었다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크게 웃으며 대화했다는 것.
요 근래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았는데, 놀라움을 많이 느꼈다.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단순하고 미성숙했던 것 같은데 대다수의 분들이 자신이 원하는 걸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었고, 그것을 얻어낼 길을 진중하게 탐색하고 있었다. 세상은 멋진 사람들로 넘친다. 자꾸 반하기만 해서 큰일이다. 닮아가려고 해야 하는데.
이번 달은 올해 중 가장 격렬한 한 달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은 이렇게나 격하게 살고 싶지 않다. 굵직한 일들이 마무리되어가니 이제는 정적인 기운을 조금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가오는 여름은 차분히 앉아서 글을 남기며 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