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워커홀릭?
10년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다. 자기 인생 최초의 소개팅 주선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전 직장동료인데 참 괜찮은 사람이니 한 번 만나보라고.
그와는 화요일, 늦은 퇴근 후에 만났다. 이것만 끝내고 나가야지, 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이 촉박했다. 허둥허둥 사무실을 나왔다. 하늘을 보니 찌뿌둥하다. 책상에 걸어둔 채 두고 나온 우산을 챙기러 다시 올라갔다 올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약속장소로 종종걸음을 했다. 설마 잠깐 걷는 사이에 비가 쏟아지지는 않겠지. 이따가 우산을 사든지 해야겠다. 시간 약속을 늦는 것보다는 우산 값 쓰는 게 낫지.
5분 정도 걸었을까. 사거리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는데 비가 똑- 똑- 정수리를 치더니 이내 후루루루룩 큰 비가 되었다. 갑자기 이렇게 비가 막 쏟아진다고...? 모퉁이 건물 처마로 후다닥 뛰어들어 비는 피했지만 빗살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둘러봐도 편의점은 보이지 않는다. 우산 챙길걸... 나는 왜 항상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릴 것이라 어림짐작하는 걸까?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분께 어디까지 오셨는지, 혹시 가는 길에 우산을 씌워줄 수 있는지 물었다.
비는 억수 같이 내렸다. 우리는 텅 빈 성수 거리를 어색하게 걸어서, 텅 빈 식당에서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 해외 생활과 업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도 나도 이리저리 해외를 떠돌다가 전공과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인생을 들어보며 각자 이런 생각을 했겠지.
'참 신기한 길을 걸었네. 오늘 빗길처럼.'
그가 내 생활에 대해 묻기에 나는 있는 그대로를 꾸밈없이 말하는 한편,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말로 꺼내놓고 보니 참 절박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4시 40분에 일어나서, 7시에 맞추어 스타벅스에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 앉아서 라떼 한 잔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정확히 8시 50분이 되면 자리를 뜨는 사람. 퇴근 후로는 동료 스터디 자료를 만들거나 자격시험 공부를 하다가 귀가하느라 저녁 식사는 10시가 다 돼서야 챙겨 먹고 잠드는 사람.
그는 황급히 아침에 책을 읽으시다니 대단하시다, 어떤 책을 좋아하시느냐, 자신은 철학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철학이요? 그럼 제가 칸트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셨겠네요. 저는 니체의 광기에 더 공감하는 편인데.'라고 재미없는 농을 던지려다 말았다.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문학을 좋아한다는 말로 대화를 얼버무렸다.
오랜 대화 끝에 그는 나를 워커홀릭이라고 요약해 주었다. 그건 아닌데. 미간이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굳은 입가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흐음........
워커홀릭이란 목표가 높고, 일 자체를 즐기며,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나로 말하자면 목표는 흐릿하고, 일은 그냥 그렇고, 피곤한 직장인일 뿐인데. 게다가 나는 워커홀릭이라기에는 좀... 남루하잖아? 진짜 워커홀릭들은... 하며 주변 얼굴들을 떠올려보았다. 딱히 워커홀릭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긴 했다. 남들보다 내가 일을 재미있어하는 건 맞지.. 잘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맞고.. 그래서 시간을 더 쓰는 것도 맞고.. 근데 난 워커홀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내가 상상하는 워커홀릭은 멋진 모습이라구.
그러다 또 눈알 굴리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내가 떠올리는 워커홀릭의 모습이 너무 미디어적인 걸까. 현실의 워커홀릭들은 아무래도 좀 찌들고 초라한 모습이려나. 찌들고 초라한 거, 그거는 나 맞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