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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Nov 29. 2021

신에 관한 나의 입장문

그대 왜 자꾸 나를 구원하려 하나요.

나는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다. 나는 무엇을 하건 간에 자주 몽상에 빠지는데, 신에 대한 상상만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상상은 재미 없다. 요즘 러닝머신을 달리면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기 시작했다. 신에 대한 이야기. 특히, 악인을 벌하는 신에 관한 상상. 따분해. 나는 그런 류의 상상을 인생의 낭비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다.


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묻지 못하지만, 내가 내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은 간단하다. 어떤 신을 상정하든간에, 신이 있으면 어쩌시게요? 신이 있기에 인생을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믿음, 다르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믿음은 정말이지 구차해보인다. 신이 없어서는 그게 안 된다는 건가.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나는 어떤 신이 있건 내 삶의 태도와 나의 인생이 일관적이기를 바란다. 나는 일관적으로 사랑하고, 일관적으로 선량하고 싶다.


이런 말들을 그가 들을 수 있다면,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너무 오만해."


그는 나의 남자친구였다. 첫 눈맞춤에서부터 아주 오래간 진심을 다해서 좋아했던 사람. 


그런 그가 9월, 10월, 11월. 세 차례 연락을 남겼다. 그간 우리 사이에 연락이 오고가지 않은지는 2년이 지난 시기였다. 우리 사이의 시차는 15시간. 우리는 이제 같은 땅을 밟고 있지 않다. 시간과 공간의 머나 먼 거리를 초월해서 그가 연락을 남긴 이유는 단 하나일테다. 그는 그때의 나를 여전히 좋아하니까. 


물론 나도 그때의 그를 여전히 좋아한다. 이건 영원히, 영원히 꺼지지 않을 감정이다. 다만 내가 변함 없이 좋아하는 그는 영원한 여름, 꼴리마에 스물세 살로 살고 있다. 스물 셋의 나와 함께 해주었던 그. 내가 그의 속눈썹 붉게 비추던 햇살을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까. 그의 그리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발등에 올라 춤을 추던 나, 맨발로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나, 아무리 좁은 길을 걸어도 그의 허리춤을 놓아주지 않던 나. 그런 천진하고 다정했던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렴.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서른하나의 내가 아니다. 짧은 머리에 오전 5시부터 일어나서 부지런을 떨고 근무 시간에는 일이 우선이라며 연락이 끊어버리고 퇴근 후로도 내 공부를 하느라 저녁 열 시가 되서 집에 기어 들어오는 나를 그는 알지 못한다. 이런 나를 알게 된다면 그는 대단히 슬퍼할 것이다.


그때의 나와 이때의 나 사이의 괴리에 대하여, 나는 일종의 책무감을 느꼈다. 알려야 한다. 되도록 확실하게. 그렇지만 어떻게?


'있지, 나는 이제 완전히 능력주의 사회의 부지런한 노예로 잘 살고 있어. 난 이제 너의 낭만주의라면 자본주의 냄새가 나지 않아서 질색이야.'


이렇게 말하면 그가 단번에 알아 들을까? '스물셋의 걔는 죽었구나!', '저건 악마야!' 단박에 깨우치고 모든 미련 뚝 떨어뜨릴까? 그렇지만 너무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것 아닐까. 어떻게 말을 하면 그를 아프지 않도록 하면서도 이 미련이라는 티눈을 시원하게 쑥 뽑아버릴까? 그렇게 몇날며칠 주저했다. 종국에 그는 내 대답을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대뜸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네가 신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함께 할 수가 없겠지."


찬물 샤워를 한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로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 억울해진다. 굳이 신이라는 칼로 나를 제단해야만 했나. 마치 종교재판에 세워진 기분이 든다. 졸지에 마녀가 되어버렸군. 그리고 안타까워진다. 유일하게 변치 않은 강단이 있다면 신에 대한 나의 생각뿐인데, 하필 그 단단한 마음이 변하기를 바라고 있다니.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표독스럽게도 신을 외면하고 있는데, 너도 참 한결 같이도 헛된 소망에 기대어 있구나.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그가 섬기는 그 신과 나의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앞으로도 영영. 내가 어떤 신을 사랑해야 한다면, 나는 페소아의 신을 사랑할 것이다. 기도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믿음, 이제는 좀 거두어주면 안 될까. 너의 맹목을 내가 어째야 할까. 너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너무 슬퍼져.




5 -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데에도 충분한 형이상학이 있다.


내가 세상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들 어떻게 아나!

내가 병이 든다면 생각을 해 보겠지.


사물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냐고?

원인과 결과에 대해 무슨 의견을 갖고 있냐고?

신과 영혼 그리고 천지창조에 관해

무슨 사색을 해 봤냐고?

모른다. 내게 있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눈을 감고 생각을 하지 않는것. 그것은 내 창문의

커튼을 치는 것. (거기에는 커튼이 없지만)


(...)


사물 내면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들에 내면의 의미 따위는 없다는 것뿐.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한 번도 본적 없으므로.

내가 그를 믿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그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겠지

그리고 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하겠지

나한테 이렇게 말하면서, 나 여기 있소!


(...)


하지만 만약 신이 꽃이고 나무이고

언덕이고 태양이고 달이라면,

그렇마년 나는 그를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매 순간 그를 믿고,

내 삶 전부가 하나의 기도요 미사이고,

눈과 기로 하는 성찬식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나무이고 꽃이고

언덕이고 달이고 태양이라면,

뭣하러 그걸 신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나는 그것들을 꽃과 나무와 언덕과 태양과 달이라 부르겠다.

(...)

만약 그가 나무와 언덕과 달과 태양과 꽃들로

내 앞에 나타나는 거라면,

그건 내가 신을 나무와 언덕과 꽃과 달과 태양처럼

알기를 바라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를 따른다,

(내가 신에 대해 신 자신보다 얼마나 잘 알겠나?)

즉흥적으로 살면서 그를 따른다,

눈을 뜨고 보는 사람처럼,

나는 그를 달과 태양과 꽃과 나무와 언덕이라 부르고,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보고 들으면서 생각하고,

매 순간 그와 함께 다닌다.




V - Há metafísica bastante em não pensar em nada.


á metafísica bastante em não pensar em nada.


O que penso eu do Mundo?

Sei lá o que penso do Mundo!

Se eu adoecesse pensaria nisso. 


Que ideia tenho eu das coisas?

Que opinião tenho sobre as causas e os efeitos?

Que tenho eu meditado sobre Deus e a alma

E sobre a criação do Mundo?

Não sei. Para mim pensar nisso é fechar os olhos

E não pensar. É correr as cortinas

Da minha janela (mas ela não tem cortinas). 


O mistério das coisas? Sei lá o que é mistério!

O único mistério é haver quem pense no mistério.

Quem está ao sol e fecha os olhos,

Começa a não saber o que é o Sol

E a pensar muitas coisas cheias de calor.

Mas abre os olhos e vê o Sol,

E já não pode pensar em nada,

Porque a luz do Sol vale mais que os pensamentos

De todos os filósofos e de todos os poetas.

A luz do Sol não sabe o que faz

E por isso não erra e é comum e boa. 


Metafísica? Que metafísica têm aquelas árvores

A de serem verdes e copadas e de terem ramos

E a de dar fruto na sua hora, o que não nos faz pensar,

A nós, que não sabemos dar por elas.

Mas que melhor metafísica que a delas,

Que é a de não saber para que vivem

Nem saber que o não sabem? 


«Constituição íntima das coisas»...

«Sentido íntimo do Universo»...

Tudo isto é falso, tudo isto não quer dizer nada.

É incrível que se possa pensar em coisas dessas.

É como pensar em razões e fins

Quando o começo da manhã está raiando, e pelos lados das árvores

Um vago ouro lustroso vai perdendo a escuridão. 


Pensar no sentido íntimo das coisas

É acrescentado, como pensar na saúde

Ou levar um copo à água das fontes. 


O único sentido íntimo das coisas

É elas não terem sentido íntimo nenhum. 


Não acredito em Deus porque nunca o vi.

Se ele quisesse que eu acreditasse nele,

Sem dúvida que viria falar comigo

E entraria pela minha porta dentro

Dizendo-me, Aqui estou! 


(Isto é talvez ridículo aos ouvidos

De quem, por não saber o que é olhar para as coisas,

Não compreende quem fala delas

Com o modo de falar que reparar para elas ensina.) 


Mas se Deus é as flores e as árvores

E os montes e sol e o luar,

Então acredito nele,

Então acredito nele a toda a hora,

E a minha vida é toda uma oração e uma missa,

E uma comunhão com os olhos e pelos ouvidos. 


Mas se Deus é as árvores e as flores

E os montes e o luar e o sol,

Para que lhe chamo eu Deus?

Chamo-lhe flores e árvores e montes e sol e luar;

Porque, se ele se fez, para eu o ver,

Sol e luar e flores e árvores e montes,

Se ele me aparece como sendo árvores e montes

E luar e sol e flores,

É que ele quer que eu o conheça

Como árvores e montes e flores e luar e sol. 


E por isso eu obedeço-lhe,

(Que mais sei eu de Deus que Deus de si próprio?),

Obedeço-lhe a viver, espontaneamente,

Como quem abre os olhos e vê,

E chamo-lhe luar e sol e flores e árvores e montes,

E amo-o sem pensar nele,

E penso-o vendo e ouvindo,

E ando com ele a toda a hora.


s.d. “O Guardador de Rebanhos”. In Poemas de Alberto Caeiro. Fernando Pessoa. (Nota explicativa e notas de João Gaspar Simões e Luiz de Montalvor.) Lisboa: Ática, 1946 (10ª ed. 1993).  - 28.

“O Guardador de Rebanhos”. 1ª publ. in Athena, nº 4. Lisboa: Jan. 1925.

  Fernando Pessoa.




시의 출처

1.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역, 민음사

2. Arquívo Pessoa, http://arquivopessoa.net/textos/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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