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페루 문학
우리가 반대되는 것, 혹은 상이한 것들이라고 생각해 오던 개념들을 곰곰이 씹어보면 실상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양극으로 여기던 두 개의 점이 사실은 맞닿아 있는 듯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두 극지가 사실은 되려 끊을 수 없도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거나, 양극의 경계가 모호해 보이는 그런 순간이요.
일례로 '길고 짧은 건 대어 보아야 안다'는 말을 들 수 있어요. 이 말은 승부의 세계에 두둥실 떠다니는 역전에 대한 야릇한 기대 이외에도 내포하고 있는 게 있잖아요. 이 어구의 좀 더 표면적인 곳까지 떠올라 보는 거예요.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느껴보는 거예요. '길다'와 '짧다'. 과연 길다라는 건 어떤 의미이고 짧다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짧은 것보다 길면 긴 것이요, 긴 것보다 짧으면 짧은 것이 아니었던가요?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나머지 하나의 의미가 모호해지고 말아요. 개념 하나의 존재만으로는 규정이 불가능한 거죠. 길다와 짧다는 둘 이상 대상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개념이에요. 이 개념은 비교 대상이 함께 공존해야만이 완성될 수 있어요. 때문에 저는 이 두 개념이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달나라에 홀로 살고 있는 당신을 상상해 보세요. 넓고 황량한 달덩이에 혼자 서있어요. 우리는 외로운 사람일 수 있겠죠.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키 큰 사람이나 키 작은 사람은 될 수가 없어요. 이 달에는 나보다 키가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의 뒤를 열렬히 쫓던 그 수많은 수식어들(크다와 작다, 뚱뚱하다와 날씬하다, 희다와 검다, 예쁘다와 귀엽다, ... ) 중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는 단어는 몇이나 될까요? 결국 ‘길다’와 ‘짧다’와 같이 우리가 반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단어들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상대적이며 공생적인 하나의 짝으로 보여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두 개의 낱말인 거죠.
빛과 어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둠은 빛의 부재 상태를 의미할 뿐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무언가는 아니잖아요. 냉기와 온기도 마찬가지예요. 물리학적으로 낮은 온도란 분자의 움직임이 느려 열 에너지가 적은 상태를 말한다는 것, 차가움은 과학적으로 열의 상대적 적음 또는 부재인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분자 운동이 멈추어 열 에너지가 없는 상태, 섭씨 -273.16도 이하의 온도는 없어요. 달리 말하자면 차가움이라는 것도 열 에너지의 부재를 말하는 단어일 뿐이예요. 결국에는 '움직임'에 대한 우리의 상대적인 감각을 차가움과 뜨거움으로 부르는 거죠. 이 세상에는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어요. 빛에 빚을 지고 있는 어둠과, 따뜻함에 빚을 지고 있는 차가움과 마찬가지로요.
Mario Vargas Llosa의 「새엄마 찬양」은 서로를 지탱하는 단어들, 빚을 지는 단어들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또한 이것이 과연 예술인가 외설인가에 대한 물음도 던집니다. 에로티시즘, 또는 외설적 아름다움을 구현해낸 작가의 시적 상상력만큼이나 그가 잘 짜 놓은 인물들이 매력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모두가 단연코 아름다운 아기 천사 알폰소를 꼽을 것 같아요. 작가는 주인공 알폰소의 선(善)에 대해 일관적으로 그려내는데요, 작품 속 알폰소는 어떤 이가 보기에도 선한 아이입니다. 알폰소가 보여주는 선함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결점이 없어요.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더라도 알폰소에 대한 외적 묘사를 읽고는 새하얀 미소를 띤 아기 천사를 상상하게 될 거예요. 그의 선함에 어떠한 의심도 품을 수 없죠. 반짝이는 그의 외모만큼이나 알폰소의 작은 행동들마저도 모두 너무나 순수하고 깨끗해요. 소설 속 알폰소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읽다 보면, 알폰소는 그야말로 주름살도 얼룩도 없는 무결점의 결정체예요. 전의상실, 무장해제. 모든 의심과 악의적 해석은 내려놓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작가는 아들 알폰소와 새엄마 루크레시아 사이의 부도덕적 행위를 통해 이를 뒤틀어냅니다.
(스포일러➡)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알폰소와 루크레시아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들은 새엄마와 의붓아들의 관계예요. 어린 아들과 엄마, 육체적 사랑이라니요. 이들 사이에 알폰소의 아버지이자 루크레시아의 남편인 리고베르토가 없었다면, 이들의 육체적 결합은 ‘덜' 추악했을까요? 루크레시아와 알폰소가 인간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생명체 둘이었다면, 그저 생물학적 종족 보전 활동, 짝짓기로 규정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는 아버지 리고베르토와의 관계성과 사회적 규범을 고려하였을 때 우리가 하게 되는 '인간적 가치 해석'상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죠. 우리는 한눈, 한귀로도 알폰소와 루크레시아의 행위는 부적절하며, 그들의 관계는 부도덕적인 것으로 판결 내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저는 한 차례 혼란스러웠습니다. 알폰소가 루크레시아와 저지른 일은 부도덕적이에요. 자신 있게, 확실히 판단컨대 부도덕적이에요. 그렇지만 알폰소는 이제 선하지 않은가요? 아버지 리고베르토는 아들 알폰소와 아내 루크레시아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리고는 루크레시아를 바로 내쫓았어요. 그러나 아들 알폰소에는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아요. 여전히 사랑하죠. 이 지점에서 아버지 리고베르토는 알폰소를 여전히 선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녀 후스티니아나는 알폰소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캐묻는 등 알폰소를 대하는 태도를 이전과 달리 해요. 그녀에게 알폰소는 이제는 악마예요. 또 한 가지 눈길을 사로잡은 점은 알폰소를 강하게 비판하는 후스티니아나가 정작 이 모든 부적절한 관계가 친엄마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녀는 알폰소가 새엄마의 자리를 앗아 루크레시아를 쫓아내기 위해 꾸며낸 일이라 추측해요. 알폰소가 사실은 악랄한 면을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스포일러)
여기에서 저는 리고베르토의 편에 설 것이냐, 후스티니아나의 편에 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선과 악, 도덕의 관념에 대한 문제이고요.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은 그야말로 인간적 가치라고 생각해요. 앞서 길다와 짧다, 빛과 어둠의 예를 소개했는데요, 과연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은 어떤 관계의 단어일까요? 빛과 열의 부재가 어둠과 차가움이었던 것처럼, 절대 선과 절대 도덕이 있느냐를 알 수 있다면 조금 명확해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과연 절대 선이나 절대 도덕이 있는가의 문제는 생각할수록 묘하게 다가오기만 하고 생각에 어떤 결론이 나지 않는 어려운 문제 같아요.
다시 알폰소의 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작가는 작품 속 알폰소를 통해 우리들에게 선과 부도덕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유하고 있어요.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 이 두 짝의 단어들로 네 가지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요, 각각의 조합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알폰소는 과연 어느 조합의 인격인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어요.
1.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 저는 겉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다고 생각해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자 스스로 노력하고요, 사회적인 압력 또한 늘 있어왔어요.
2. 악하고 부도덕적인 사람. 우리는 되도록 이런 사람을 피하려고 해요. 사회는 늘 악하고 부도덕적인 사람을 줄일 방안을 모색하고 있어요.
3. 악하지만 도덕적인 사람. 저는 이런 사람들을 합리적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맘 속이 어떻든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적 가치는 지키는 사람들이죠.
4. 선하지만 부도덕적인 사람. 맑지만 정돈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선의의 거짓말도 이쪽으로 분류되지 않을까요.
(스포일러➡) 소설의 중후반부까지의 알폰소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선인으로 그려져요. 알폰소는 너무도 희고 눈부셔 발을 디뎌 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눈밭 같은 아이예요. 마치 방금 쌓인 눈으로 환하게 덮인 창 밖 풍경 같은 날들이 계속돼요. 가끔 우리는 그 평화로운 풍경 속 불길한 징조들을 느끼지만, 이내 우리는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지'하며 우리의 알폰소를 용서하고, 소설은 흘러갑니다. 작가는 이렇게 이 아이의 순수로 우리의 눈이 멀게 하는데요, 작품 말미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장막을 거두어냅니다. 순수와 사랑스러움으로 빛이 나던 ‘폰치토’를 한 겹 벗겨내요. 햇볕이 눈송이를 비추면 눈송이가 반짝이다가도, 볕이 계속되면 결국 눈송이가 녹아내리고 마는 것처럼요. 부지불식간에 알폰소의 영민함이 교활함일 수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게 해요. (⬅스포일러)
땅에 내린 눈송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녹아 진창이 되기 마련이잖아요. 진창이 된 눈처럼 선 또한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일까? 눈이 녹아 개울이 되고, 흘러 흘러 바다가 되듯이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도 결국에는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제 나름 내린 결론은요, 그럼에도 꽃이 피어나는 곳은 새하얀 눈 밭이 아니라 더러운 진창이라는 것. 선과 악을 이분하고 정의해서 뭐하겠어요. 우리 사는 곳은 절대 선의 성역도 절대 악의 구역도 아닌 진창인 것을요.
작품명 새엄마 찬양 | Los cuadernos de don Rigoberto | The note book of don Rigoberto
저자명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Mario Vargas Llosa
역자명 송병선
출판사 문학동네
1. Alejandra de Argos by Elena Cué Interview with Mario Vargas Llosa, Nobel Laureate, https://www.alejandradeargos.com/index.php/en/all-articles/21-guests-with-art/41600-interview-mario-vargas-llosa
2.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18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