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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Jul 15. 2022

그냥 계속하니까 이루어졌다_버티기의 힘

그리고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세 번의 실패


작년 9월의 글을 다시 꺼내 보았다.

실패를 다루는 마음에 대해서: 시험 삼수, 이번 시험 망쳤어요. 조각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https://brunch.co.kr/@hnote/3


제목부터 절절한데, 실상 내용은 별것 없다. 준비 중인 자격시험을 세 번이나 낙방하면서 글로 징징거리고 눈물 짜고 또 그렇게 흘린 눈물은 다시 스스로 닦고 하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이야기다. 지금 다시 꺼내 읽어보니 시험 불합격만으로도 어떻게 저렇게 정신이 잔뜩 움츠러 들었는지 신기하다. 아마도 내가 여태까지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에 배팅하지 않는 안전한 인생만을 살아온 탓일 것이다. 무엇 하나에 여러 번 고배를 마시는 일을 자주 겪지 못해서 그런지 작은 실패에도 나는 무척이나 괴로웠다. 실패는 내게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버티기

오전 6시 30분의 스터디 카페

그 글로부터 9개월. 여전히 자신 없고, 확신 없는 상태였지만 나는 그저 계속 공부했다. 매일 같이 오전 04시 50분에 일어나서, 굼뜬 몸동작으로 최소한의 출근 준비를 하고, 05시 25분쯤 집을 나서 광역버스에 몸을 태웠다. 쪽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버스에서의 시간은 온전한 휴식도 놀이의 시간도 아니었다. 피로에 짓눌려 감긴 눈꺼풀과 의자에 푹 가라앉은 몸덩이. 침잠한 몸과 달리 머리와 마음은 늘 잠들지 못하고 수런댔다. 어제 저지른 실수, 스마트하게 답하지 못한 말들, 오늘 마쳐야 할 일, 글로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광역 버스에서의 한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버스에서 하차하는 시간은 06시 30분. 보통의 카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각에도 스터디 카페는 열려 있다. 그곳이라도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갈 수 있는 곳이 그곳 뿐이라는 게 또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목적지를 고민할 필요 없이 늘 스터디 카페로 흐느적흐느적 걸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나에게 공부는 그렇게 앉아서 그냥 하는 것이었다. 이미 1년 반 이상의 시간을 들여온 공부라 더 이상 어렵지도 않았다. 그만큼 재미 없어지기도 했다. 이제 읽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나는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무지와 해박함 그 사이 어딘가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텍스트는 새로울 것 없이 익숙하고 지겨웠지만 끝내 내 것이 되지는 않을 모양인 듯했다. 수면 위로 올라가 해를 볼 날이 올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이제 나는 수심을 가늠해보기를 포기했다. 그저 헤엄쳤다. 날마다 그날 가진 힘만큼 헤엄치고 집에 돌아갔다.


네 번째 도전


그리고 지난 6월 나는 그 시험을 다시 치르었다. 네 번째 도전이었다. 시험장까지 가는 길은 전과 같았지만, 내 걸음걸이는 천근만근이었다. 시험 시간은 4시간.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한데, 발걸음도 마음도 무겁기만 했다. 


네 시간이 어찌나 쏜살 같이 지나는지, 금세 타종 소리와 함께 시험 답안을 제출을 해야 했다. 시간은 오후 두 시. 머릿속은 아직도 열기로 가득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채찍질 당하며 답안 작성을 재촉하던 오른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시간을 내리 시간에 쫓기다가 시험장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미묘하게 비현실적이었다. 결과야 어떻든 나는 꾸준히 노력했고, 포기하지 않았다. 이 단 하나의 사실이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했다. 했어. 이렇게 속 시원할 수가.

오후 2시 30분의 버거킹

그제야 밥 시간을 놓친 위장이 자기주장을 편다. 배가 고프다. 아침 열 시부터 쉴 틈 없이 머리를 쥐어 짜낸 뒤였다. 배가 몹시 고프다. 인근의 버거킹으로 느적느적 걸어가 버거 세트를 하나 먹었다. 분명 허기지고, 당도 부족한 상태 같은데 막상 햄버거는 술술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한 시험 또 치렀구나.'


아무래도 이번에도 합격은 어렵겠지? 뻥 뚫린 듯 시원했던 속이 금세 턱 막힌다. 꾸역꾸역 감자튀김을 집어삼키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시험 결과를 받아볼 때까지는 푹 쉬자. 마지막 감자튀김을 집어 꿀떡 삼키고, 가슴 끝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있는 힘껏 가슴을 공기로 채우자 뜨끈한 피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핑하고 세상이 돌기 전에 얼른 숨을 풀었다.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또 떨어진대도 다시 공부하면 그만이야. 온몸에 흐르던 긴장감도 천천히 천천히 내려앉는다. 공기가 빠지며 몸이 시들시들해지자 시험이 정말 끝났다는 게 실감 난다. 쉬자. 쉬어.


마지막 결과

오전 7시 00분의 헬스장

나는 성심을 다해 있는 힘껏 쉬었다. 그동안 공부를 우선하느라 미뤄두었거나 게을리하던 일들을 차곡차곡 내 하루 일정에 다시 편입해 넣기 시작했다. 운동에 좀 더 열중했고, 책을 더 읽었다. 전이라면 거절했을 예정되지 않은 모임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었다. 이런 식으로 힘껏 살면 시간이 좀 더 빨리 흐르는 듯하다. 금세 시험 결과 통지 문자를 받아보게 되었다. 예정된 날보다 일주일이나 빠른 결과 통지였다. 또다시 '불합격' 글자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는 다 되지 않았는데... 이제 매번의 불합격에 무던해져야 한다. 그래야 계속할 수 있다.


무던해지기, 무던해지기. 나와의 짧은 약조 문을 읊조리며 결과를 확인했다. 결과는 '합격 예정'. 한눈에 믿을 수가 없는 결과였다. 합격이라니. 전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도, 시험을 잘 치지도 못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오로지 버티기로 이뤄낸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버티지 않았다면 기회를 잡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오늘

오후 2시 00분의 메시지

시험 결과를 확인하고 2주가 흘렀다. 그간 증빙서류를 제출해 응시자격 검증을 받았고 합격이 확정되어 자격증을 출력했다. 출력한 자격증은 SW기술자 경력관리시스템에도 등록해서, 오늘 승인 결과까지 받았다. 이제 정말 내 것이 된 자격증인데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해서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다. 팀장님께도 취득 사실을 함구하고 있는 상태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근거 문서가 YES라고 말해주는데도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언제나 문제는 마음인 것이다. 지난 실패가 힘들었던 이유도 마음 때문이었고, 기다리던 결과를 받아보고 나서도 기뻐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마음 덕분에 꿈틀거리고 있기도 하다. 오전 4시 40분에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마음, 책상 앞에 앉게 하는 것도 마음, 다음 일을 도모하게 하는 것도 마음.


What's next


실패-버티기-실패-버티기-실패-버티기-성공. 마침표가 하나 생긴 이때, 이어갈 말은 무엇인가. 내 생활은 변화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어떤 말로 다음을 시작해야 할지. 침묵. 침묵. 침묵. ... 그러나 침묵 때문에 애태우지는 말자. 마음이 곧 입을 떼고 알려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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