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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Jul 19. 2022

다섯 번째 모임_델리의 모든 얼굴

「델리」, 쿠쉬완트 싱

성실은 어려워

모임 후기를 순차적으로 작성한는 데 실패했다. 세번째 모임에서 읽은 책, 샤힌 아크타르의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를 다 읽지 못해 이 책의 리뷰부터 써두었었다. 두서없는 모임 후기가 부끄러워서 다 읽고 모임 차례대로 써보려고 했지만, 책 읽기가 여의치 않다. 이래서는 앞서 모임을 끝낸 책들에 대한 감상이 모두 휘발될 위기라 용납하고 싶지 않은 짓을 한다. 퇴근 후 스타벅스에서 디카페인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먼저 읽은 쿠쉬완트 싱의「델리」부터 후기를 남기게 되었다. 성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델리: 특별할 것 없는 제목


이 책의 첫인상은 그랬다. 제목이 <델리>라니, 너무 시시하잖아.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랬다. <델리> 말고 다른 멋진 제목은 없겠다.

<책, 익다>에서 와인 한 잔과 독서

나는 인도를 가본 적이 없다. 나에게 인도는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나라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내가 인도에 관해 보아 온 모든 이미지, 내가 전해 들은 모든 진술은 극단을 달린다. 인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타지마할과 갠지스 강도 그렇다. 타지마할이라는 건축물의 이미지가 나에게 주는 탈인간계의 평화로움을 생각하면 인도는 천상의 나라 같다. 반면 갠지스 강의 이미지는 어렴풋한 회상만으로도 구역질을 일으키고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여행으로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의 평 또한 극과 극이다. 홍대의 <책, 익다>라는 북 바에서 이 책을 읽고 있자 주인장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인도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였다며, 과연 어떤 책일지 궁금하단다. 반면에 여행자에 절대 친절하지 않은 인도 시스템과 인도 음식의 악랄함을 떠올리며 인도 여행을 인생 최악의 경험으로 꼽는 친구들도 있다. 방문객을 매료하기도 내치기도 하는 인도의 델리는 대체 어떤 곳인 걸까. 공존할 수 없는 가치가 공존하는 세계라니. 그게 이 책을 시작할 때 첫 페이지를 시원하게 넘길 수 있던 동인이었다. 나는 인도가 너무나 궁금했다.


델리: 소설의 강렬함


이 책의 도입부는 아름답고 힘이 넘친다. 어떤 말과 글보다도 강렬하게 델리를 묘사하고 정의 내리는데, 결국 이 첫 도입부가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정수였다고 생각한다. 델리가 가지고 있는 양면의 얼굴, 그 극단의 대비와 경계 사이에서 작가의 단어들이 꿈틀꿈틀 헤엄친다.


이 책의 형식도 특기할만하다. 과거 인도 역사의 주요 장면들의 이야기들과 현재의 한 바그마티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소설에 크게 두 개의 시간적 흐름이 있는 것이다. 과거 인도 역사 이야기는 600년 간의 시간 흐름을 담고 있다. 각 편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시작되어 작게 막을 내리고 끝난다. 그리고 바그마티의 이야기는 조금씩 전진해나가며 이어진다. 덕분에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양쪽의 이야기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작가는 균형미를 아는 사람이다.


인도 역사가 낯선 나에게 바그마티 이외의 이야기는 모두 난관이었다. 특히나 익숙하지 않은 새 이름들의 지속적 등장은 내게 큰 고난이었다. (러시아 문학을 처음 읽는 고통보다 심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바그마티 이야기를 더 읽고 싶어서 그 모든  난해한 이야기들을 읽어 넘길 수 있었다. 지루함과 자극적 이야기의 반복. 이 또한 작가의 설계라고 생각하면서.


바그마티


이 소설에서는 실로 다양한 대비가 반복되어 제시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대비는 남녀 성역할의 대비인데, 이 경계에 놓인 존재가 바그마티이다. 바그마티는 남녀의 성기를 모두 가진 남녀추니로, 성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바닥 인생을 산다. 그는 제대로 된 종교생활도 하고 있지 않으니, 결국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최저의 인물인 셈이다. 바그마티는 가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뮤즈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모든 극단의 화신이면서, 중간자이고, 동시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바그마티의 주요 '고객'이다. '나'는 시크교도이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의 실상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델리의 낡은 아파트에서 그 천한 바그마티를 찾고 기다리는 인생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제대로 된 직업도, 여자도, 재산도 없는 쪽박 인생에, 기댈 곳이라고는 바그마티뿐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의 정신승리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천한 바그마티를 자신의 삶 속으로 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그마티는 필요하지만 소중해질 수는 없는 인간으로 존재한다. 여성 성기를 지니고 있지만 여성일 수 없고, 남성 성기를 가지고 있지만 남성일 수 없는 그의 정체성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는 부정당하고 외면당한다. 오로지 그의 결핍, 천박함, 추함만이 들춰지고 회자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도가 사람을 나누고 대하는 자세가 화자와 바그마티 간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수 불가결한 사람도 얼마든 불가촉천민일 수 있는 곳. 그것이 순리이고 자연스러운 곳. 


이 도시의 스펙트럼과 혼돈


내가 속한 공간 속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섭리인 곳이 바로 델리다. 델리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구역질 나도록 너절하다. 델리의 삶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넘쳐흐르도록 부유하다. 델리는 다신교도의 도시이면서 유일신교도의 도시이다. 델리는 성 개방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델리는 문란한 사람들의 도시이면서 정숙한 사람들의 도시이다. 델리는 피 터지게 폭력적이면서도 오후 네 시의 햇살처럼 평화롭다. 델리는 정갈하고 이지적이면서도 추접스럽고 천박하다. 델리는 선과 악이다. 그리고 이 모든 차원 속에 '나'와 바그마티가 있다. 소설은 이러한 혼돈 속에 시작하여 혼돈 속에 끝난다. 양 극단과 그 경계의 모호함을 보여주는 작가의 영리함에 감탄하게 된다.




만나서 나눈 이야기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이랬다.

게더 타운에서의 모임

[이름]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의 이야기라서 이름이 줄 수 있는 정보를 알지 못해 읽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아마 성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는 점(예를 들면 계급이나 종교 등)이 많았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좀 더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 문학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이 알면, 많이 볼 수 있다.


[재미] 이 책은 두께에 비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편이다. 그러나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인도 600년 역사의 주요 장면들은 이해하기 난해하여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종교(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에 대한 지식이나 이들 종교 간 분쟁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면 정말 재미있지 않았을까.


[종교]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읽어왔지만 대부분 중동, 아랍 지역 중심의 서술이었다. 이번 아시아 문학 읽기 세션을 통해서 동남아시아 및 인도에서의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종교는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서부터 인생 가치관을 지배하기 때문에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종교에 대한 이해는 꼭 선결돼야 할 것 같다.


[델리] 이 소설 자체에서 굉장한 인도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세세한 시각적 묘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델리의 어딘가에 들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델리가 느껴진다. 경계 지을 수 없는 그 어딘가라는 혼란 속의 델리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델리에 대한 인상 또한 극단을 달렸다. 꼭 가보고 싶다는 참여자(나)도 있었지만, 델리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는 분도 있었다.


[연결] 우리가 모임 첫 책으로 읽었던 아시아 단편선「물결의 비밀」에 실려 있던 인도 단편 <곡쟁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단 한편이었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인도의 단편 <곡쟁이>에 묘사된 사회 속 문화와 「델리」 속의 문화가 중첩되는 지점 속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반가움을 느꼈다. 조그만 이야기를 하나 읽었던 경험 하나만으로도 낯섦이 반가움이 될 수 있다. 더 열심히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를 읽어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반복하건대, 나는 델리가 더 궁금해졌다. 언젠가 꼭 여행해보고 싶은 도시, 델리.




책 정보

쿠쉬완트 싱, 「델리

https://ridibooks.com/books/1963000028

「물결의 비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5914955


관련 글

「물결의 비밀」, <곡쟁이>에 관한 글

https://brunch.co.kr/@hnote/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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