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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Apr 28. 2022

첫 번째 읽기_아시아가 들려주는 목소리들

아시아 세션#1_「물결의 비밀」

Introduction

첫 책은 아시아 단편선집인 「물결의 비밀」로 정해졌다. 도서출판 아시아의 계간지에서 그간 소개되었던 단편을 엄선하여 만들어진 책이었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중국, 일본 등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는 아시아 나라들뿐만 아니라 인도, 터키와 같이 어쩐지 더 멀리 느껴지는 나라들의 단편들도 실려 있었다. 단편 하나하나 앞머리에 작가에 대한 정성스러운 소개글에서 작가들의 성장배경이나 화려한 수상경력들을 보면서는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머나먼 미지 신비의 인물들처럼 느껴졌다. 첫 책으로써 참 영리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점이 되기에 충분히 진하고 큰 점이 될 터였다. 책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랬다


첫 모임까지는 약 2주간의 시간이 있었다. 평소 여러 권의 책을 돌려가며 읽는 습성 때문에 책 한 권을 시작해서 읽고 마치는 주기가 매우 긴 편인 나로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일정이었다. 이번 책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오랜 기간 2주에 한 권씩을 소화해야 했다. 부지런히 읽어야 했다. 아침, 출근 전에 잠시 간 가지는 내 소중한 독서 시간을 모조리 이 모임에 써야 할 판이었다. 걱정이 앞섰다.

 


첫 장 넘기기

내가 책을 펼친 것은 어느 월요일 오전 7시였을 것이다. 제대로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진 습관이 그렇다. 주말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이처럼 설레는 독서를 앞두고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월요일 출근 전, 회사 근처 카페에서 이 책을 처음 펼쳤으리라.


앞선 염려는 도서의 제목이 되기도 한 첫 단편, <물결의 비밀>을 읽으면서 완전히 녹아들었다. 첫 작품의 흡입력이 뛰어나서 나는 금세 이 책에 흠뻑 빠져 읽었다. 실린 단편들 중 무엇 하나 나를 지루하게 하는 이야기가 없었다. 모든 이야기들이 나에게 익숙해서 더 깊게 다가오는 전율을 남겼다.


이 책은 물과 흐름에 대한 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물결의 비밀> 줄거리

칠월 보름날 밤, 홍수가 한창이던 마을에 미군의 일제 폭격으로 인한 제방이 무너져 강물이 마을을 휩쓸게 된다. 주인공은 물을 피해 이제 막 출산을 마친 아내와 갓난 아들을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간다. 그때 물에 휩쓸려 가던 한 여인을 보고 놀란 아내가 아이를 물속에 떨어뜨리고 만다. 아이를 구하려 아내와 주인공은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과 그의 아이는 구해내지만 아내는 구하지 못한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주인공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다 깜짝 놀라고 만다.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은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도 하고,  늘 새로운 물이 흘려 떠나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물은 그저 흘러가지만 강은 늘 제자리를 지킨다. 이 소설은 강을 통해서 미국과의 전쟁, 그로 인한 상실과 상처들, 그리고 남겨진 이가 살아가는 삶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강물은 시간처럼 흐르고, 시간처럼 강물 위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가. 그 어느 때보다 밤이면 내 고향 강물은, 그 표면은 셀 수 없이 많은 신비한 반점들로, 내 생애 은밀한 비밀들로 반짝반짝 빛났다.

9쪽. <물결의 비밀>, 바오 닌(베트남)


우리 아시아 사람들, 특히나 벼농사를 지어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물과 강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강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삶을 앗아가기도 하는 곳이다.



인상적이었던 단편 세 편


그다음으로 인상적인 단편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편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 우리네 근현대소설과 똑 닮은 <지 패오>


이 단편을 읽고 그런 의문이 들었다. 


'벼농사를 지어먹고사는 지역들의 이야기는 다들 고만고만한 건가?'


놀랍도록 우리가 자랄 때 읽고 들었던 이야기들과 비슷한 단편 하나를 소개한다. 베트남 작가 남 까오의 <지 패오>이다. 이 이야기는 베트남 한 시골마을의 '지 패오'라는 이름만 가지고 부모도, 집도, 절도 없이 살아가는 한 사내의 이야기다. 농촌 마을에서 밭 한 뙈기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과 가엾음은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매 하나였다.


놈도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긴 세월이 흘러갔는지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놈들에겐 생년을 기록한 카드조차 없었고, 마을의 인명장부에도 놈은 여전히 유민계층으로 신고 된 상태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해놓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한 스물다섯인가 되었을 때부터는 나이를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놈에게는 날과 달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놈은 언제나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놈의 취기는 이전의 취기에서 다음번의 취기로 넘어가는 것이어서 언제나 길게 취한 상태였다.

81쪽. <지 패오>, 남 까오(베트남)



둘, 장례식이 뭐길래, <곡쟁이>


얼마 전, 세계의 장례 문화에 대한 책을 소개받은 일이 있었다. 과연,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가. 세상 사람들 사는 모습이 다양하듯이 망자를 보내는 모양새 또한 다채로운가보다 하며, 책을 읽지는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이번 단편선에서 만난 <곡쟁이>를 읽으며 영 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사람의 열망은 어디서든 비슷해 보인다. 생존에 대한 열망, 자존 과시를 위한 열망, 그리고 상실을 치유하고자 하는 열망.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었지만, 사니차리는 슬픔 때문에 죽지 않았다. 슬퍼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독한 재난을 당한 뒤에도 사람들은 차츰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마당에서 고추를 물어뜯고 있는 염소를 쫓아낸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먹지 못하면 죽는다. 사니차리가 그렇게 많은 슬픔을 겪고도 살아남았다면, 비크니를 잃고도 살아남을 것이다. 사니차리는 슬픔에 넋을 잃었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돈, 쌀, 새 옷, 이런 것들을 대가로 얻지 않는다면, 눈물은 쓸모없는 사치다.

237쪽. <곡쟁이>, 마하스웨타 데비(인도)



셋, 종교 하나 뛰어넘지 못하는 사랑 <모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종교 하나 뛰어넘지 못하는 사랑의 하찮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사랑마저 뛰어넘는 신앙의 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 당신이 질투를 하건 말건 나한텐 상관없다고요."
"당신이 계속 그렇게 나오면 우리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소?" 티얼로천은 이렇게 반어적으로 질문하곤 했다.
그러면 모젤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결국 시크교도를 못 벗어나요, 이런 바보 같으니!" 그녀가 외쳤다.
"누가 당신더러 나하고 잘 지내라고 그랬어요? 잘 지내고 싶으면 고향으로 가서 시크교도 여인을 만나 결혼하세요. 나하곤 항상 이런 식일 테니까."

268쪽. <모젤>, 사다트 하산 만토(인도)


이 이야기는 결말이 특히나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누구 하나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끝나는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덧붙이는 이야기일 텐데, <모젤>을 읽으면서 시크교도들 터번 속 머리가 대체 어떻길래 몹시 궁금해져서 구글링까지 해보았다. 터번 속의 머리는 마치 조선시대 남성들이 상투 튼 모습과 비슷했다. 겉은 색달라도 속은 또 동색인 모습들을 보면서 인간과 인간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문화 스펙트럼이 사실은 별로 다양하지도 않단 생각이 든다. 이에 더해서 종교들(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 불교)에 대해서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교인의 눈으로는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왜들 그렇게 별나게 충돌하는지 알고 싶다. 




관련 글


첫 번째 모임_메타버스 세계에서 열린 독서 모임:「물결의 비밀」

https://brunch.co.kr/@hnote/66


책 정보


「물결의 비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591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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