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지. 나는 나의 기억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사소로운 일과 중요한 일을 가리지 않고 곧잘 잊었다. 긴장감을 더해보거나 수시로 복기를 해보는 것도 나의 건망 앞에서는 무용해지곤 했다. 이 정도는 기억할 수 있지, 자신하던 모든 일은 지연과 지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내 자신의 기억력에 맡긴다는 것은 내게는 예측하지 못한 사건의 창조였다. 실수하기, 사과하기, 때 놓치기, 무마하기. 나의 기억력에 대한 불신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사회관계관이 눈 감아 줄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까지 쌓였다. 불신의 이력이 더는 쌓이지 않도록 조치가 필요했다. 나는 기억력은 외주를 주기로 했다. 아주 간단한 방식이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캘린더에 등록하기.
일요일에 팀장님이 먼저 출장을 가게 되었다. 팀장님의 출국이 확정되고 티켓이 발권되자마자 내가 한 일은, 그의 출국 일정을 내 캘린더에 등록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 줄 사이에서 앞사람의 발걸음만 멍하니 바라보며 빈 공간이 생기면 얼른 채우는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을 하는 타이밍을 노리기로 했다. 출국 두 시간 전을 리마인더에 등록했다.
"팀장님 출국 인사"
이런 식으로 나의 외주 용역 발주는 날이 갈수록 사소하고 섬세한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나의 기억력은 그에 맞추어 점점 더 미끈하게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세상의 균형은 이런 미세한 영역까지 그 마수를 뻗치는 것이다. 전진이 있으면 퇴보가 있다.
핸드폰이 절대 울려서는 안 되는 일요일 오후였다. 핸드폰이 절대 울릴 수 없는 날의 오후였는데, 핸드폰이 경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진동음에 가슴이 철렁, 전신이 펄떡 함께 요동쳤다. 누구지? 급한 업무 이야기가 있는 회사 사람일까? 아니면 별안간 수다를 떨고 싶어 하는 친구일까? 그 어느 쪽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쉬는 날 모르나, 쉬는 날? 그래도 받아야겠지... 안 받으면 안 될까. 그래도 최소한 누군지는 확인해야겠지... 송글 맺히는 식은땀을 의식하며 가까스로 핸드폰을 뒤집어 진원지를 확인했다.
"팀장님 출국 인사"
아. 그새 까먹고 있었다. 팀장님이 오늘 출국하시지. 인사드려야지. 오늘도 나는 리마인더 없이는 이 작은 일 하나 해낼 수가 없구나. 하지만 다행이다. 전화가 아니라서. 그리고 곧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과거의 나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인사 리마인더를 세팅해두었지만 오늘의 나는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그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 못 볼 사이도 아니고 2주 뒤면 나도 그를 따라 출국할 예정이었다. 곧 볼 건데 해야 하나? 그래도 해야겠지...
나는 형식적인 인사를 형식적인 공간을 통해 전하기로 했다. 프로젝트 그룹챗에 안전 비행을 기원하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해냈어. 팀장님은 나처럼 휴일에 온 전화를 머뭇거리며 외면하는 분이 아니신지 곧바로 '휴일'에 웬일이냐며 예상치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정 없이 사람을 대했던가...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휴일에 연락을 드리는 게 아무래도 낯설긴 하지... 안 그래도 형식적이었던 인사가 더욱 경직되기 시작했다. 조심히 가세요. 나는 황급히 인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이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잘 도착하셨구나.
"근데 너 무슨 일 있니?"
엥? 난데없는 물음에 당황스럽다. 없는데요. 출국하는 분에게 안전 비행을 기원한 것이 이렇게 각별한 주의를 환기시킬 일이었던가. 참 예민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행동의 변화나 무드의 변화를 늘 캐치해내시는데, 그게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타인이 자신을 투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 내가 보이고자 하는 모습 그 이상을 보는 사람은 어쩐지 나를 더 움츠러들게 한다.
그는 요즘 나와 대화할 일이 영 없어서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불현듯 걱정이 되셨다고 했다. 그럴 법하였다. 항상 팀원들과 밥을 사 먹고 다녔었는데, 아침에 운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단백질 섭취를 신경 쓴다고 도시락을 싸 다니며 혼자 밥을 먹은 지 세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팀원들과 전에 없던 거리감이 생겼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고독한 도시락 생활을 그만 둘 생각도 없었다. 이제는 단백질 섭취보다는 시간 절약으로 독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이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팀장님께 나도 함께 식사하지 않게 된 게 마음에 걸리지만 개인적인 욕심을 소화하려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며 해명과 양해의 말을 올렸다. 그리고 근황 이야기도 드릴 겸 미루고 미루던 DAP 합격 소식도 전해드렸다. 몇 팀원에게는 말했는데, 건너서 듣게 되면 슬퍼하실 것 같아서 기회가 온 김에 입을 열었던 것이다. 팀장님은 간단한 축하를 해주셨고 그 뒤로는 갑자기 밀려온 업무 때문에 이야기가 끊어졌다. 대화의 중단,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굴었던가? 오후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뭘?
요즘 나는 캄보디아 업무 외에 다른 국가 프로젝트를 하나 돕고 있는데,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인 데다가 요구하는 지식의 범위가 지금까지의 업무에 비하면 방대했다. 그야말로 최대의 고민거리. 이 업무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으면 금방 퇴근시간이 오곤 한다. 아마 이 프로젝트가 팀장님의 불길한 예감의 발원지가 아니었을까. 내가 어디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대며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팀원 누구라도 어느정도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눈에 띄게 헤매고 있었고 불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고민과 의문 중 정리된 것 하나 없이 퇴근하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끝없는 고민 때문에 퇴근을 미룰 수는 없으므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어느새 몇 곱절로 증식해버린 크롬 탭과 무성한 오피스 창들을 하나하나 끄고 있는데, 메일이 하나 왔다.
"YYY 이사 입니다."
팀장님의 메일이었다. 오전에 후루룩 넘겨버린 대화를 메일로 다시 이어주신 것이었다.
다시 합격에 대한 축하.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 대한 칭찬과 격려.
새 업무로 내가 느끼고 있을 부담감에 대한 걱정.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 대한 격려와 응원.
팀장으로서 앞으로 나의 업무 방향과 커리어 개발에 대한 고민.
그런 것들이 팀장님 특유의 편안한 어투로 담겨있었다.
메일을 끝까지 읽고 났을 때는 당황했다. 이게 끝인가. 축하와 격려와 걱정과 고민 이외의 메시지는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대화만이 있었고 업무 지시가 없었다. 처음이었다. 업무 이야기가 없는 이메일이. 나는 메일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메일이 담고 있는 게 마음뿐이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내가 느끼고 있는 어색함 곱씹었다. 어색을 벗어내고 그 마음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다소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지막 줄을 읽고 다시 읽었다.
"일이 안 풀리면.. 가끔은 나한테 물어봐줘~~"
참 든든하고 사려 깊은 응원이었다. 새로 지시받은 업무에 대해서 위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내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모르겠어서 한참 고심하던 때였다. 지쳐있다거나 격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건 아니었는데, 팀장님의 말들을 읽으며 잃은 줄도 몰랐던 기운이 다시금 솟는 걸 느꼈다. 막연한 욕심 속에서 이리저리 무작정 헤집고 다니고 있을 때 나에게 도착한 팀장님의 메일은 내게 안도와 용기를 동시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