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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Oct 10. 2022

직장불만족1_다들 있잖아요, 갑자기 이력서 쓰고싶은 날

나도 모르게 키보드에 손이 자꾸 가네

(광고)가 내 맘을 흔드네


평범한 아침 8시 55분이었다. 그 시각이면 나는 사무실에 막 도착해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서 이메일을 읽는다. 사실 업무 메일은 알람이 오는 대로 읽는 편이라, 아침에 읽는 메일은 구독해둔 메일링 서비스들이나 개인 메일함을 읽는다. 바로 업무에 착수하고 싶지 않은 직장인의 마음을 달랠 시간이랄까.


눈에 띄는 메일이 하나 있었다.

(광고) 특별채용! 9/16 마감!!!


3일 뒤 마감인 한 채용공고를 홍보하는 메일이었다. 내가 구독해둔 한 기업이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구독해둔지 3년이 넘었는데, 채용공고 메일이 날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회사에서 이러면 안 되겠지만 나도 모르게 손이 막 가서 열어재껴버리네.


정말 흥미로운 공고였다. 좀처럼 신입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 기업이었는데 3개월 간의 교육을 거쳐 앞으로 전문가로 활용할 사람을 모집할 계획이라는 것.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업무였기에 마음이 동했다. 


그런데 지원 마감 4일 전에 알려주는 건 좀...



손이 가요 손이 가


그날부터 나는 출근 전후로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 책을 읽던 두 시간과 퇴근 후 시간을 몽땅 바쳐, 이전 연도의 공고문들을 다 읽어 분석하고 자기소개서 항목을 어떻게 구성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기로 했다.


자율 형식에 분량 제한이 없는 지원서였다. 다만 써야 할 항목으로 세 가지가 주어졌다.

1) 자기소개

2) 나의 경쟁력

3) 대표 프로젝트


나는.. 취업준비생 때 정석 취업 준비 루트를 밟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소개서 작성이나 면접 경험이 별로 없다. 아이고. 막막하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출처: 면접왕 이형 유튜브, 면접관이 5초만 봐도 합격시키고 싶은 자소서 작성법 3가지

유튜브를 둘러보면서 어떤 점을 강조해서 담아야 할지에 대해서 힌트를 얻었다. 요는, 내가 전시하고 싶은 특성을 선별하고, 그를 뒷받침해 줄 경험을 수치에 입각하여 정리해 쓰라는 것이다. 음. 과연! 그렇군!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고. 두야.


가장 먼저 꺼내 본 것은 내 출입국 사실 증명서였다. 정확하게는 대한민국 출입국대를 통과한 날짜를 증명해주는 문서이기 때문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를 알려주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진첩과 이메일을 참조해서 어느 때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리해보면서 지난 6년 간의 직장생활이 꽤 정리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미 없이 엄청나게 돌아다닌 인생이었다. 자기소개서에 쓸 말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지만, 지원 의지에 강력한 불쏘시개가 되어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반노숙자로 살 것인가! 


지긋지긋한 해외사업 인생,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에 불 타올라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인생의 모든 대소사는 모두 해외에서 이루어졌음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아, 이대로는 안 돼. 정말.


3가지로 MECE 하게


https://igotanoffer.com/blogs/mckinsey-case-interview-blog/mece

나는 어떤 질문이더라도 세 가지로 나누어 내용을 조직하고 소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세 가지 질문의 답변이 MECE 하도록 조직하려고 노력했다. MECE는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의 약자로 컨설팅사인 맥킨지의 방법론 중 하나다. 항목들이 상호배타적이면서도 모였을 때는 완전한 총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림)


첫 질문이었던 자기소개 항목은 특히나 공들여서 썼다. 전공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첫 직장, 그리고 지금의 고민과 계획을 최대한 시간순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대학생활)-(첫 직장 선택)-(직업적 성장 노력) 세 단계로 소항목을 나누어 작성했다. 내가 했던 주요 활동과 선택들에서 내 성격이 드러나도록 어떤 고민을 통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의 성과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마지막에 불렛으로 정리해 넣었다.


나의 경쟁력을 정하는 게 참 오래 걸렸는데, 막연히 나의 최대 강점이 뭘까를 고민해보니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내 안에는 다양한 기질과 성격들이 있고, 그것들은 세상과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서 어떤 때는 장점이 되기도 했고 단점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방향을 바꾸어서, 나의 모습들 중 어떤 걸 좋아할까?를 질문해보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의 인재상과 회사 대표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아이디어를 생각해 정했다. MECE 할 수 있도록 자기소개에서 보이는 성격 외의 다른 점을 꼽아 작성했다.


대표 프로젝트는 사실 내세울 것이 없었다. 지원하는 회사의 업무에 맞는 프로젝트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큰 시사점이 있었던 프로젝트를 마찬가지로 3개 선정했다. 새롭게 맡은 영역이 있었다거나, 배움이 컸던 프로젝트로 골라 작성했다.


너무.. 흥분했나..


다 쓰고 나니 너무 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인사팀에 있는 친구에게 적절한 분량을 물었다. 친구는 한 질문당 2,000자를 넘지 않도록 써야 한다고 했다. 겨우... 2,000자요...?


나는 만연체 투머치 토커인지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그게 되지 않았다. 제출 마감시간은 계속해서 다가오는데 줄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유 없이 분량을 늘리려고 쓴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더는 삭제할 문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카페의 직원이 슬쩍 다가와 이제 마감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자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ㅎ... 


'제출'


자소서 한 질문에 5,000자씩 써내는 미친놈... 바로 나...


이제 내 손을 떠나버린 지원서. 어쩔 수 없지. 조용히 결과나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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