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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불만족13_전력질주 인수인계

퇴사 일주일 전에 전사 자기소개는 왜 하고 있냐..

by H 에이치

예... 해야죠... 인수인계...


연봉협상을 마치자마자 현 직장으로 달려왔다. 저... 사표 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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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놈펜에서부터 퇴사하겠다고 이야기는 꺼내놓은 탓에 팀장님이며, 사수며, 심지어 사장님까지도 내가 이미 퇴사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사장님께서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친히 문자메시지까지 보내주셨다. 데이터는 진심 좋은 방향이며, 나를 응원하신다고.) 이미 주변에서 퇴사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사표 제출은 행정적 문제에 가까웠고,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와 같은 문제들이 더 시급하게 느껴졌다. 새로 할당받은 업무들도 있어서, 퇴사까지의 길이 멀고 험하게만 느껴졌다. 언제 다하나.


첫 직장에서 퇴사할 때가 떠올랐다. 마지막 주에는 내내 야근을 했다. 지하철 막차 시간에 맞추어 퇴근하기 일쑤였고, 마지막 출근날까지도 회사 문단속을 하고 나갔더랬다. 한겨울, 히터도 끊긴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파쇄기를 돌리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퇴사해야 하는지 서글프다가도 명함을 파쇄하면서는 어찌나 후련하던지.


두 번째 퇴사, 야근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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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직전에는 원래 이렇게 항상 업무가 과중한 걸까? 첫 직장을 퇴사할 때 겪었던 야근 폭탄이 다시 또 내 발등에 떨어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분이 많이 달랐다. 이번에는 팀장님으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다. 새 회사 입사 전에 한 주는 꼭 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연차를 쓸 수 있도록 업무 부담을 많이 덜어주셨다. 어떻게든 잘 마무리하고 잘 쉬고 싶은 마음에 신나게 야근을 할 수 있었다. 주어진 일은 끝내 놓고 싶었고, 계속 진행될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해놓고 싶었다.


다만 내 맘을 슬프게 했던 것은, 나의 공석을 메꿀 새 인력이 충원되지 않았으며 앞으로 한참 그럴 일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결국 나는 내 업무를 쪼개서 팀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작성한 인수인계서만 4개. 이 말은 즉, 네 사람이 내 일을 나눠 가져 갔다. 떠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운데 일까지 쥐여주고 가야 한다니. 참.. 무심한 회사.



전직원 자기소개요? 저는 내일부터 회사 안 나올건데...


진행 중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서를 작성을 미친듯이 하고 있는데, 전사 메신저가 울렸다. 사장님이 전사 자기소개 회의를 열자고 하셨다. 평상시에 프로젝트 팀제로 운영되며 서로 다른 근무지에서 일을 하 있기도 하고, 코로나19로 인해서 만나기가 더 힘들어진 요즘이라 제안한 행사였다. 환경과 문화가 이러하다보니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커녕 회사에 100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실감하기 쉽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자기소개와 하고 있는 일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 요지였다. 이것 참 곤란하네.


'아... 저는... 컨설팅5팀 H 책임인데요... 지금은 사직서를 쓰고 있고요...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옵니다..'


그렇게 사실만을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잠시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머리를 비우고, 간략하게 이름과 직함, 투입 중인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입을 싹 닫았다. 감사합니다.


퇴사 전에 전사 자기소개라니 별일을 다 해본다. 내 소개를 끝내자마자 재빨리 창을 전환해 그룹웨어에 사직서와 휴가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개인 사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개인 사유로... 5일간의 연차를... 신청하오니... 재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밥 사주고, 밥 얻어먹기


퇴사 전에는 밥 한 번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더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여러 사유(해외 출장, 초청연수, 국내 프로젝트, 병가, 연차)로 자리에 안 계신 분들도 있었고, 밥 먹을 새 없이 바쁜 날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꼭 챙겨주고 싶었던 손아랫사람들(?)은 모두 대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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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좋은 걸 사주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만족스런 식사를 대접할 수 있어서 기뻤다. 팀의 막내 선임님에게는 내 나름 조언의 말을 열심히 했는데, 그에게 내 말들이 의미 있고 실용적이었을지는 미지수다. 조언을 가장해서 내 자랑이나 한 건지도 모르겠다.


손윗사람들에게는 밥을 얻어먹었다. 이직 경위에 대한 질문이 한바탕 쏟아지고, 걱정과 응원이 오고 갔다. 걱정은 이전 글(직장불만족 9_퇴사하겠습니다.)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업무가 잘 맞아야 할 텐데.



마지막 근무일까지 야근해야 '아, 이제 정말 이직하는구나' 싶지


모두가 퇴근한 시각, 나 혼자 남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던 업무 마무리(ppt/word 산출물, 인포 노트 작성, 출장비 정산, 프로젝트 회계정산)를 하고, 업무 인수인계서 중 갈무리 못한 부분을 작성했다.


인수인계에 대해서 사람들 대부분이 대충 하라고들 이야기 했다.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말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나는 나 없이도 모든 게 제대로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업무지시서에 가까운 인수인계서를 만들고 나왔다. 지금까지 마무리한 일은 물론이고 앞으로 예상되는 업무의 시기와 주기에 따라 to do list처럼 작성했다. 인수인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팀장님도 같이 챙겨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 보시겠지.) 혹여라도 나에게 연락해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일 이야기가 아니라 근황 이야기가 오고 가는 연락만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업무 인수인계서를 마무리 작성하고 나니 밤 11시다. 이게 이직하는 자의 최후인가... 그래도 계획한 일을 모두 끝마치고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인수인계서는 메일 송부도 하고 인쇄도 1부씩을 해서 각자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한주간 쉬고 나서 송별회를 하러 하루 나오기로 했다. 추가 요청이나 질문이 있으면 그날 인계 마무리를 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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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 부지런히 야금야금 짐을 집에 날라둔 덕에 마지막 날에는 가져갈 짐이 많지 않았다. 나의 손목 보호를 위한 로지텍 에르고 K860 키보드만이 그 육중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키보드를 위해서 기다란 요가 매트 가방을 별도로 챙겨 왔더란다. 모든 짐을 치우고, 빈 책상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일부터는 내가 없을 자리. 한참을 비어있게 될까, 누군가 금방 채우게 될까?


괜히 사무실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다른 회사 소속으로 프로젝트를 했던 때까지 셈하면 거의 3년 가까운 시간을 오고 간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근 뒤로도 한참 문짝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미운 구석이 없는 곳을 떠나려니 맘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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