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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Dec 11. 2022

직장불만족13_전력질주 인수인계

퇴사 일주일 전에 전사 자기소개는 왜 하고 있냐..

예... 해야죠... 인수인계...


연봉협상을 마치자마자 현 직장으로 달려왔다. 저... 사표 내야 하거든요..? 



사실 프놈펜에서부터 퇴사하겠다고 이야기는 꺼내놓은 탓에 팀장님이며, 사수며, 심지어 사장님까지도 내가 이미 퇴사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사장님께서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친히 문자메시지까지 보내주셨다. 데이터는 진심 좋은 방향이며, 나를 응원하신다고.) 이미 주변에서 퇴사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사표 제출은 행정적 문제에 가까웠고,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와 같은 문제들이 더 시급하게 느껴졌다. 새로 할당받은 업무들도 있어서, 퇴사까지의 길이 멀고 험하게만 느껴졌다. 언제 다하나.


첫 직장에서 퇴사할 때가 떠올랐다. 마지막 주에는 내내 야근을 했다. 지하철 막차 시간에 맞추어 퇴근하기 일쑤였고, 마지막 출근날까지도 회사 문단속을 하고 나갔더랬다. 한겨울, 히터도 끊긴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파쇄기를 돌리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퇴사해야 하는지 서글프다가도 명함을 파쇄하면서는 어찌나 후련하던지.


두 번째 퇴사, 야근은 이어진다



퇴사 직전에는 원래 이렇게 항상 업무가 과중한 걸까? 첫 직장을 퇴사할 때 겪었던 야근 폭탄이 다시 또 내 발등에 떨어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분이 많이 달랐다. 이번에는 팀장님으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다. 새 회사 입사 전에 한 주는 꼭 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연차를 쓸 수 있도록 업무 부담을 많이 덜어주셨다. 어떻게든 잘 마무리하고 잘 쉬고 싶은 마음에 신나게 야근을 할 수 있었다. 주어진 일은 끝내 놓고 싶었고, 계속 진행될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해놓고 싶었다.


다만 내 맘을 슬프게 했던 것은, 나의 공석을 메꿀 새 인력이 충원되지 않았으며 앞으로 한참 그럴 일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결국 나는 내 업무를 쪼개서 팀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작성한 인수인계서만 4개. 이 말은 즉, 네 사람이 내 일을 나눠 가져 갔다. 떠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운데 일까지 쥐여주고 가야 한다니. 참.. 무심한 회사.



전직원 자기소개요? 저는 내일부터 회사 안 나올건데...


진행 중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서를 작성을 미친듯이 하고 있는데, 전사 메신저가 울렸다. 사장님이 전사 자기소개 회의를 열자고 하셨다. 평상시에 프로젝트 팀제로 운영되며 서로 다른 근무지에서 일을 하 있기도 하고, 코로나19로 인해서 만나기가 더 힘들어진 요즘이라 제안한 행사였다. 환경과 문화가 이러하다보니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커녕 회사에 100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실감하기 쉽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자기소개와 하고 있는 일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 요지였다. 이것 참 곤란하네.


'아... 저는... 컨설팅5팀 H 책임인데요... 지금은 사직서를 쓰고 있고요...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옵니다..'


그렇게 사실만을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잠시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머리를 비우고, 간략하게 이름과 직함, 투입 중인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입을 싹 닫았다. 감사합니다. 


퇴사 전에 전사 자기소개라니 별일을 다 해본다. 내 소개를 끝내자마자 재빨리 창을 전환해 그룹웨어에 사직서와 휴가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개인 사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개인 사유로... 5일간의 연차를... 신청하오니... 재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밥 사주고, 밥 얻어먹기


퇴사 전에는 밥 한 번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더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여러 사유(해외 출장, 초청연수, 국내 프로젝트, 병가, 연차)로 자리에 안 계신 분들도 있었고, 밥 먹을 새 없이 바쁜 날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꼭 챙겨주고 싶었던 손아랫사람들(?)은 모두 대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최고로 좋은 걸 사주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만족스런 식사를 대접할 수 있어서 기뻤다. 팀의 막내 선임님에게는 내 나름 조언의 말을 열심히 했는데, 그에게 내 말들이 의미 있고 실용적이었을지는 미지수다. 조언을 가장해서 내 자랑이나 한 건지도 모르겠다. 


손윗사람들에게는 밥을 얻어먹었다. 이직 경위에 대한 질문이 한바탕 쏟아지고, 걱정과 응원이 오고 갔다. 걱정은 이전 글(직장불만족 9_퇴사하겠습니다.)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업무가 잘 맞아야 할 텐데. 



마지막 근무일까지 야근해야 '아, 이제 정말 이직하는구나' 싶지


모두가 퇴근한 시각, 나 혼자 남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던 업무 마무리(ppt/word 산출물, 인포 노트 작성, 출장비 정산, 프로젝트 회계정산)를 하고, 업무 인수인계서 중 갈무리 못한 부분을 작성했다. 


인수인계에 대해서 사람들 대부분이 대충 하라고들 이야기 했다.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말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나는 나 없이도 모든 게 제대로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업무지시서에 가까운 인수인계서를 만들고 나왔다. 지금까지 마무리한 일은 물론이고 앞으로 예상되는 업무의 시기와 주기에 따라 to do list처럼 작성했다. 인수인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팀장님도 같이 챙겨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 보시겠지.) 혹여라도 나에게 연락해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일 이야기가 아니라 근황 이야기가 오고 가는 연락만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업무 인수인계서를 마무리 작성하고 나니 밤 11시다. 이게 이직하는 자의 최후인가... 그래도 계획한 일을 모두 끝마치고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인수인계서는 메일 송부도 하고 인쇄도 1부씩을 해서 각자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한주간 쉬고 나서 송별회를 하러 하루 나오기로 했다. 추가 요청이나 질문이 있으면 그날 인계 마무리를 하면 됐다. 



일주일간 부지런히 야금야금 짐을 집에 날라둔 덕에 마지막 날에는 가져갈 짐이 많지 않았다. 나의 손목 보호를 위한 로지텍 에르고 K860 키보드만이 그 육중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키보드를 위해서 기다란 요가 매트 가방을 별도로 챙겨 왔더란다. 모든 짐을 치우고, 빈 책상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일부터는 내가 없을 자리. 한참을 비어있게 될까, 누군가 금방 채우게 될까? 


괜히 사무실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다른 회사 소속으로 프로젝트를 했던 때까지 셈하면 거의 3년 가까운 시간을 오고 간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근 뒤로도 한참 문짝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미운 구석이 없는 곳을 떠나려니 맘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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