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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Oct 13. 2022

직장불만족5_회사로 돌아가는 길.. 신발부터 갈아 신자

원래 걷던 길을 걸으려면 원래 신던 신을 신어야지

12시

대표님과의 면접은 장장 두 시간 진행된 끝에 마무리되었다. 이만한 시간이면 영혼까지 탈곡된 기분이었어야 할 텐데, 피곤함은 느끼지 못했다. 이유를 찾아보자면 주로 말을 한 쪽은 대표님이었고, 나는 가끔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가진 생각에 대해서 한 두 마디를 얹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면접하면 떠오르는 압박을 위한 질문이나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주는 질문을 전혀 받지 않은 것도 이 상쾌함에 큰 몫을 한 것 같다.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서 으레 주고받는 사소한 질문조차도 전혀 받지 않아서 다소 섭섭하기도 했다.



내가 받지 못해 다소 섭섭했던 아이스브레이킹용 질문의 예는 다음과 같다.

자기소개 해볼래요?

집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려요?

좌우명이 뭐예요?

취미가 뭐예요?


감사히도 내가 받지 않아 감사했던 스트레스성 질문의 예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어 전공? 스페인어 한 번 들려줄래요? 알아 듣지는 못하는데.

잦은 야근 괜찮나요? 많이 시킨다는 건 아닌데.

지금 직장은 왜 그만두고 싶어요? 뽑아준다는 건 아닌데.

결혼 계획 있나요? 다른 의도가 있는 질문은 아닌데.

아이는요? 애국은 해야죠. 회사도 중요하고.


사실, 뭐 하나 제대로 묻고 답한 게 없는 것 같아 잠시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낌새를 알아차리셨는지 대표님은 내가 가진 태도나 기질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시기도 했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계속해주셔서 면접이라기보다는 면담 같았다. 오히려 가슴이 부푼 채로 면접장을 나오게 되다니.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면접이 길었던 건 좋다. 그만큼 오래 이야기했다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직장인이다. 그것도 반차를 내고 면접을 보러 나온 직장인. 그런데 면접이 12시에 끝나면, 점심은 언제 먹고 회사까진 언제 가나?


점심은 길에서 먹고, 회사는 빨리 가야지, 뭐.


서둘러서 지하철 역으로 걸었다. 지하철 역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청바지와 운동화를 꺼냈다. 출근하려면... 평소 복장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나의 최근 12개월 간의 출근룩을 떠올려 봤을 때 이 하늘색 셔츠도 투머치 멋스러움이지만 상의까지 챙겨 오기엔 짐이 너무 많았다. 대충 단추를 몇 개 풀고 소매를 걷었다. 그냥 갑자기 조금 멋 낸 것 같아 보이겠지...? 면접을 떠올리진 않을 거야..? 밸런스를 위해서 하의와 신발은 평소보다 더 후줄근한 걸로 골라 왔다구..


세면대에서는 눈 화장을 지웠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 면접 때도 그냥 평소처럼 안경을 쓸까 했지만, 지원서 사진과 최대한 비슷한 얼굴로 나타나야 한다는 게 나의 판단이었다. 개인적으로 면접관으로 면접을 본 적도 있는데 지원자의 첫인상이 지원서의 사진과 괴리가 크면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사진만큼 예쁘고 멋진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스러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자신이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소개라고 생각해서. 아무튼 증명사진은 안경을 끼지 않고 찍었기 때문에 렌즈를 끼고 나와 면접을 보았는데, 아뿔싸. 안경을 안 챙겨 나왔다. 최근 12개월 간의 출근용 얼굴을 떠올려봤을 때, 안경 없는 나의 얼굴은 몹시 수상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한 70%의 완성도로 마무리된 출근용 몸뚱이를 끌고 지하철을 탔고, 내려서는 삼각김밥을 먹으며 회사로 달려갔다.


 회사, 내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합격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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