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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Dec 13. 2022

직장불만족14_쓸쓸한 송별회와 끈적한 혼술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것 참 난감하네

일주일간 인수인계를 치르고는 휴가를 내고 일주일을 쉬었다. 별다른 일 하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쉬며 보낸 일주일이었다. 주변 지인들 대부분은 내가 대단한 여행 기획하길 기대했지만(그간 쌓인 항공 마일리지가 26만 마일..), 나는 오로지 가만히 쉬고 싶었다. 늦잠 듬뿍 자고, 커피 내려 마시고, 주전부리 먹으며 티브이 보고, 다시 잠들었다가, 출출할 때 밥 먹고, 커피 한 잔 더 내려 마시고, 또 눕는... 그런 꿈같은 생활을 했다. 밀린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나의 다짐은 잘 지켜내지 못했다. 7년 간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한 움큼씩 쌓인 명함을 정리해야겠다는 다짐도 지켜내지 못했다. 읽고 싶은 책 탑과, 뭉텅이 명함은 그대로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마지막 출근


금요일이었다. 해가 정수리 위이 떠있을 시간이 되어서야 눈이 뜨였고 그 이 후로도 한참을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오늘은 회사엘 가야 한다. 표면 상의 이유는 노트북 반납과 송별회였지만, 거부하려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던 방문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회사에 가기가 싫었다. 일이 넘치고 혐오하는 사람과 만나야 했을 때도 이렇게나 회사가 가기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회사가 정말 가기 싫었다.


회사에 가야 할 이유라면, 하나였다. 팀장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팀장님과는 프놈펜에서 함께 일하다 같은 날 귀국했지만 개인적 일 때문에 내가 본사 사무실 출근을 하는 동안 자리 비우셨었다. 사표 수리 같은 행정적 업무는 모두 온라인 처리해주셨지만 떠나는 길 제대로 된 인사를 올릴 수 없었다. 팀장님께서도 그게 마음에 쓰이셨는지 어렵게 일정을 비워 송회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의문스럽다. 떠나는 직원이 뭐가 예쁘다고 밥과 술을 먹여가며 보낼까.


팀장님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 직장을 관둘 때 했던 실수, 그로 인해 인연을 잃는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영등포가 종점인 이 버스앞으로 오래도록 탈 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일지 모르겠다는 감상에 젖으니 몸이 한결 더 무거워졌다. 버스 좌석 속으로 몸이 꺼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버스가 양화대교를 건널 때는 눈물마저 나려는 걸 꾹 눌러 담았다. 무슨 눈물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슬픔은 아니었고, 후련함도 아니었다. 떠나는 사람으로서의 죄스러움과 새로 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려움이 교차했다.


네 시쯤 도착해서 인수인계에 문제는 없었는지 살피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오후 시간의 도로 사정은 내 예상과 달리 교통량이 더 많았다. (나는 새벽차 타고 다니는 사람... 관련 글: 미라클 경기도민이 된 사연) 생각보다 너무 늦게 도착한 사무실은 어쩐지 공기가 더 무거웠다. 어떤 표정을 하고서 어떤 말들을 주고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부과하고 있는 죄책감에 눌려 주눅 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프로젝트 중간에 이렇게 일을 놔버리고 가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였다.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내면서 나는 작은 소리들에 머리칼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여기가 이렇게 어려운 공간이었던가.


인수인계서를 미리 주고 업무 설명까지 끝마친 동료가 있었던 반면, 휴가 직전의 야밤에 이메일로 인수인계서를 보내 놓고 구두 설명을 못한 동료 있었기에 남은 인수인계를 하려 했는데 딱히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역시 프로들..) 질문이나 추가 요청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정리했다. 노트북에 붙여 두었던 네 잎 클로버와 바다 스티커를 떼어내고, 원드라이브 동기화를 해제하고 데이터를 지웠다.  노트북은 금세 깨끗하게 청소되어 새로운 주인에게 넘겨질 것이다. 안녕. 새 인연은 커피 쏟지 않는 차분한 사람이기를 바라.


쓸쓸한 송별회


회식 장소에 가서야 팀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게 웃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웃음이 나질 않았다. 팀원 절반 정도가 참석한 자리였다. 휴가 중이라서, 출장 중이라서 공석인 분들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들까지 슬퍼하고 아쉬워하기보다는  오늘 자리해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에 집중하려 했다. 팀장님 얼굴을 마주하면 기쁠 줄 알았지. 그런데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 건지 당최 알 수 없어 괴로웠다. 억지로 당겨 놓은 입꼬리를 하고서는 침만 꼴깍 삼켰다.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낯서네. 마치 지금까지 팀원들 먹고 싶은 거 챙기지 못했던 팀장이었던 듯이 말하시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뭐든 팀원들부터 챙겨주시는 분이시면서, 새삼스레. 삼겹살에 돼지갈비, 소갈비까지 골고루 시키는데 팀장님이 옆에서 슬쩍 사이다를 주문하셨다. 이건 더 낯서네. 사람들과 술 한잔 하는 걸 참 좋아하시는 분인데 이날은 사이다였다. 이슬이 담긴 소주잔들 사이로 보글보글한 사이다가 담긴 소주잔이 어찌나 멋쩍어 보이던지.


비단 팀장님이 들고 있던 사이다 담긴 소주잔만 멋쩍은 것은 아니었다. 탄산 터지는 톡톡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막한 테이블.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히죽거리기와 풀 죽은 눈으로 고기 바라보기를 사이를 삼겹살 뒤집듯 오고 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아무 말이라도 해보자. 너무 나갔나? 침 꼴깍. 아니, 애당초 이 자리에 내가 끼어 있는 게 맞는 일일까.


이 날, 우리는 물장구만 치다가 헤어졌다. 나는 도저히 마음속 깊고 따듯한 곳에서 부유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건져내 놓고 말하지 못했다.


속상했다. 조금 더 기쁘거나 조금 더 슬프기를 바랐나 보다.


끈적한 혼술


Bar 이순

모두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멈칫거리는 발걸음으로 길을 헤맸다. 혼자라도 한잔을 더 할까? 이대로 집에 가면 밤이 너무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내 발길은 계속 우왕좌왕했다. 오로지 술을 마실 작정으로 혼자 바에 가본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책을 읽겠다거나 글을 쓰겠다 따위의 주목적이 따로 있었다. 술이 마시고 싶어서 바를 가도 될까. 그것도 이렇게 쓸쓸한 기분으로.


이때, 떠오르는 바가 있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축복인가. 축복이다. 이순의 문을 열자마자 확신했다.


바 테이블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사장님이 오늘은 정말 혼자 온 거냐며 던진 농담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지난번에 각자 혼자 왔다고 주장하는 손님 둘(나와 열음님)이 모여 앉아 한참을 주접떨다 갔던 걸 기억하시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정말 혼자 왔다고 답하며,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입꼬리를 동여맸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즐겁게 마셔보자고. 지난번에 재고가 없어 맛보지 못했던 포 필라스(Four Pillars)의 Shiraz Gin을 발견하고는 입가가 화사해진다.


진토닉이 몰고 온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송별회에서 팀장님께 마음속 감사와 슬픔, 아쉬움에 대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이쯤이면 귀가하셨을 시간. 전화를 드리는 것은 처량한 데다가 오해를 살 여지도 있을 것 같아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오르락 내리락, 바쁜 나의 입꼬리...


내가 구질구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딱해 보였는지 사장님이 와서 말을 걸어 주셨다. 오늘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었어요... 방문 횟수로 두각을 나타내던 손님 아니었지만 직장을 옮기고 나면 한동안 못 올 것 같네요... 축축한 목소리로 사정을 털어놓자 사장님은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럼 한잔을 내주셨다. 누군가에게 기념할 일이 생기면 꺼내는 술이라고. 바닐라 향이 포근한 필리핀산 럼, 돈 파파(Don Papa)였다.

생각지 않게 술을 두 잔이나 마셔버렸다. 볼이 따끈한 것이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는데, 집에 가기가 싫다. 그때 맞춰 팀장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메시지를 읽고 나니 마음이 다시 천근만근이 된다. 정말 집에 가기 싫어진다. 아니, 영등포를 떠나기 싫다.


사장님, 제가 한잔만 더 마시려고 하는데요. 칵테일 하나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끈적한 걸로요.


사장님은 나의 요상한 요구사항에 잠시 당황하시다가 금세 붉고 예쁜 칵테일을 한잔 만들어주셨다.


미련 줄줄의 밤. 여기 영등포에 다 흘리고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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