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후련한 퇴사 통지가 있을 수 있는가?
팀장님과 사수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드렸다.
팀장님은 전화기 너머로 그 이야기를 들으셨고, 사수에게는 툭툭을 타고 가다 이야기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앉은자리에서 술을 곁들여하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어떤 수상함을 직감하셨는지 자꾸 물어오는 탓에 덜덜거리는 툭툭 안에서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상사와 동료들의 리액션에 대해 일일이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조회수가 하찮더라도 엄연히 공개된 공간이니까.
우려와 응원의 말들이 교차했다.
연봉 협상이 대면으로 진행되면서 나는 이직처의 연봉도 모르는 채로 퇴사를 결정했다. 신입 모집 공고에 지원하여 합격했다는 이야기에 다들 처우에 대해서 무척이나 우려했다. 내가 나이브하게 별 걱정하지 않고 있던 지점이기도 했다. 신입 모집이었지만 지원 자격이 2년 이상의 경력자였고, 이전 근무처와 연봉을 기입해 제출 한 점, 그리고 연봉 협상 시 급여 증빙 서류들을 준비 해오라는 걸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내 생각에는 직전 연봉을 보전해주거나 낮아지더라도 내가 수용할 만큼의 조정일 것 같았다. 외부의 시선은 달랐다. 해외사업 경력이 6년이 넘었는데, 신입으로 파격 할인을 당할까 봐 다들 걱정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깎인다면 아주 속상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더라도 나는 전직을 해야겠다.
데이터 전문가에는 많은 직무가 있고, 내가 지원한 공고에는 정확한 분야(데이터 분석, 데이터 아키텍트 등)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3개월 간의 교육 훈련을 거쳐 데이터 관련 실무에 투입된다는 막연한 정보만이 제시되어 있었다. 면접 시에도 사실상 내 업무 능력에 대한 질문은 많지 않았고, 데이터 분야로 진로를 변경하는 데 대한 확신이 있는지, 배울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는지가 주요 화두였다.
팀장님은 3개월 간의 교육 기간 동안 원하는 분야와 직무를 확실하게 어필하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절대로 회사에서 정하게 두지 말라며... 그러면서 덧붙여 말씀해 주시기를, 내가 가진 인문학적 소양을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 직군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도 해주셨다. 엔지니어들의 업무와 업무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을 것이라고도 해주셨다. 사실 내가 여태까지 공부해온 분야는 데이터 모델링이었는데.. 확실히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팀장님께 만큼은 당시의 내 심정을 가감 없이 투명하게 이야기드렸다.
'가서 다시 바보가 돼서 일할 생각을 하면 정말 두렵고 무서운데요. 이만큼의 용기는 지금, 이때가 지나면 내지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사실 정말 두렵다. 어문학 배경의 내가, 데이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개발이나 DB 운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상 생존이 어렵다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읽고 들었다. 그 말들 모두 '너는 못 해'라는 말로 들렸다. 이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부수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모든 크고 작은 변화도 모두 두렵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하고, 관계를 새로 쌓는 일이 두렵다. 그 사람들과 새롭게 알아가며 협업해야 하는 것도 두렵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열등감을 느끼게 될까 봐 정말 두렵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새로운 곳에서 새로 시작할 용기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내지 못할 것 같다.
팀장님은 내 이야기에 무척 놀라셨다고 했다. 그런 마음인데도 가려고 하는구나.
나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했다.
'일은 잘해.'
그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나를 쫓아올 습성이라고 하셨다. 어딜 가서라도 잘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이 말은 조건부. 온전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나의 타고난 성격, 회사에서의 모습의 결점들에 대해 생각했다. 업무에 있어서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고, 정리정돈에 서툴고, 허둥대며, 꼼꼼하지 못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친화력이 부족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직설적이며 날카롭게 대응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일을 잘한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라면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일을 잘한다고 평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무언가 제 역할은 하는 사람이라고 바꾸어 듣기로 했다. 새로운 곳에 가더라도 나는 내 역할을 찾을 것이고, 그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다. 초조해 말자.
내 선택에 대해서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소식을 들은 분들 모두 고개 끄덕이고 이해해주셨다. 참 나다운 선택이고, 좋은 선택이라면서. 한국에서 소식을 들은 분 중에 따로 연락을 주신 분도 계셨다. 지금까지 잘 해왔고, 앞으로도 좋은 미래가 열리길 바란다는 말로 운을 띄우시고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내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다고 해주셨다. 그리고 데이터는 아주 좋은 방향이라고 응원해주셨다.
나는 사실 내 결정에 확신이 없었는데. 비록 답을 정해두고 결정 내린 사람에게 으레 하는 빈말들일 수 있겠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연락과 만남을 꼭 이어나가자는 말, 결국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 더 성장해서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말들이 참 큰 응원이 되었다. 이런 조언도 있었다. 업무 빈틈을 잘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하고 싶은 일에 더 매진하기를 바란다고. 남들 생각하느라 시급한 일 떠맡아하는 습관을 좀 버리라고. 내게 중요하고, 내게 의미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 욕심부리고, 내 능력을 좀 더 믿고 일하라고.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렇게 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알겠지만, 그걸 잘 해낼 자신이 없다. 많이 배운 모습으로 새로 만나기 위해서 가장 긴요하게 바꾸어야 할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많이 욕심 내고, 욕심만큼 배우고, 다른 프로젝트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누가 퇴사를 고하는 것이 속이 후련하다 했지? 나는 잘 모르겠다. 슬픔이 반이 넘는다.
면접장을 나서면서 했던 결심 하나가 있었다. 이번 면접 결과가 어떻든지 데이터에 대한 공부는 계속 하자. 해야 한다. 면접 때, 했던 말이 있었다. 꾸준히 공부를 해서 기술자격증 합격을 하기는 했지만, 내게 그 자격증은 하늘에 떠있는 공중정원의 성처럼 느껴진다고. 성 하나가 토대 하나 없이 둥둥 떠있다고. 그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보려고 SQL도 공부해보고 했지만,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고 막연하기만 하다고. 나의 한탄 같은 고백을 듣고 면접관이었던 대표님은 씩 웃어 보이면서 물어왔다.
"내 책은 읽어봤어?"
그때 그의 그 미소를 보고 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가 갈구하던 것이 그 책에는 있나 보다. 면접장에서 나오는 길에 결정했다. 내일모레 출국 전까지 어떻게든 저 책 사서 가지고 떠난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을 프놈펜까지 챙겨가지고 왔다. 본문만 600쪽이 넘는 책이라 무게만으로도 출장 짐으로 챙기기엔 부담스러운 책이었지만, 빼놓고 올 수 없었다. 읽기를 더 미뤄둘 수 없는 책이었다.
이제는 면접 결과도 들었고, 이직에 대한 결심도 끝냈다. 마음가짐이 같을 수 없었다. 퇴근 후로 아무리 피곤하고 할 일이 많더라도 책을 펼치려고 했다. 단 몇 줄을 읽더라도 말이다.
한 줄이라도 더 준비된 모습으로 입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