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비행을 마치고, 새벽 시간이 되어서 프놈펜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왔던 숙소를 다시 찾았다. 이 숙소에서 보낸 시간만 해도 이제 5개월에 가깝다. 들어서자마자 끼쳐오는 익숙한 이미지들. 로비 바닥에서 풍기는 세제 냄새. 낯익은 엘리베이터 동작음, 현관 열리는 소리. 아는 이미지, 아는 소리, 아는 냄새. 꿈에서 한 차례 깼다가 같은 꿈으로 다시 들어온 기분이 든다. 3시간 자고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상황. 진짜 잠을 자자. 꿈에서 깰 수 있도록.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생각했다. 프놈펜에 왔으니 프놈펜 사무실로 출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면접실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인사 담당자 이야기로는 최종 결과는 이번 주 중에 나온다고 했다.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서류를 제출한 시간대가 마감 5분 전이었으니 내가 아마 마지막 지원자였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 면접자였을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합격자 선정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면접관이 회사의 대표였으니 그의 말이 곧 결론이 될 터였다. 대표님의 결단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면접에서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이 결단에 오랜 시간 걸릴 것 같지도 않았다. 주말 간 이미 결정은 내려졌을 것이다. 계획대로 가느냐, 계획을 조금 수정하느냐.
오랜만에 출근한 프놈펜의 사무실. 어제 숙소에 들어서며 했던 생각과 별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광경, 내가 비우고 간 그대로 남겨져 있는 내 자리. 익숙함은 편안함이다. 익숙함은 지겨움이다. 익숙함은 괴로움이다. 같은 자리에 앉으며 날이 갈수록 고통을 더해갈 직장 생활을 예감했다.
마음의 준비는 아직
혹시라도 올 수 있는 연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국서 사용하던 유심을 태블릿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수시로 확인해댔다. 전화가 올런가, 문자가 올런가. 전화가 온다면 합격, 문자가 온다면 불합격일 터였다.
합격과 불합격. 두 경우 모두 가능했다. 면접실을 나서면서는 합격에 대한 확신이 컸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오전 내내 귀국 일정과 이직 일정이 맞지 않으면 어찌 되려나, 퇴사에 대해서는 어느 순간에 누구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에 매진했다. 상황별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차근차근 정해나갔다. 합격의 경우에 대한 생각을 끝내고 나니 점심께가 되었다. 이제는 탈락의 경우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탈락의 경우에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의 문제가 주어질 뿐. 조금 크게 한숨 쉬고 나서 일이나 열심히 잘해야지 뭐. 기왕 이렇게 마음이 흔들린 때에 다른 회사들에도 이력서를 내봐야 하나.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Safe
에이. 오늘은 안 오려나 보다. 어느새 주어진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여기서의 일은 잘해야 한다. 어떤 경우더라도 내 일은 잘 마쳐야지.
생각보다 일찍 귀가했다. 어제 리셉션 직원이 없어 제대로 밟지 못한 체크인 절차를 밟고, 장을 보고 왔다. 매번 가던 한인 마트를 갔다. 이제 그곳에서의 나의 동선은 어떤 군더더기도 없다. 김치와 두부가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로 가서 늘 사던 김치와 늘 사던 두부를... 늘 사던 두부를... 낯익지 않은 무언가가 보인다. 새로운 두부가 들어와 있었다. 종류별로 하나씩, 삼 종의 두부를 샀다. 기분이 좋아진다.
마트를 나서는데 날씨가 우중충한 것이 심상치 않다.
"비 올 거 같은데.."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려 발길을 재촉했다. 숙소 로비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는데, 멀리서 빗방울이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캄보디아에서 많은 폭우를 경험했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은 처음 경험해본다.
투-둑-투-둑.투두두둑.
순식간에 빗방울의 리듬이 빨라진다.비는 먼저 소리로 귀를 때렸고, 미적지근하고 굵은 물방울 하나로 어깨를 때렸다. 얼른 층계를 밟으며 뛰기 시작했다. 출입문까지 다섯 걸음. 문을 열어재껴 로비로 뛰쳐들어왔다. 빗방울 소리가 하나로 모여 끈김 없이 긴 굉음으로 이어진다.
You are safe!
황급히 뛰어 들어온 우리들에게 직원이 미소와 함께 말해줬다. 살은 거구나. 솨-, 하고 엄청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등 뒤로 흐르고 있었다. 제때 들어와 살았구만. 내가 살리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앞으로 내가 해낼 또다른 것들에 대한 행운의 징조이길.
MMS
방에 올라와장 봐온 김치 한 통과 두부 세 모를 냉장고에 넣었다. 냉동실을 꺼버릴 수는 없는 걸까. 쓰지도 않는데 켜 두고 있는 게 영 싫다. 소파에 던져둔 백팩을 다시 들고와 정리하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꺼내서 충전기에 꼽으려는데, 문자가 와있다. MMS.
Subject: [Web 발신] 주식회..
내가 지원했던 회사명 앞머리 두 글자가 보였다. 내려받지 않아서 아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해외에서 MMS를 열어보려면 데이터 로밍을 켜고 다운로드를 받아야 한다. 열어보지 않았지만 알 것만 같은 느낌. 탈락인가 보다. 한껏 바닥으로 주저앉은 어깨를 하고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울컥) 데이터를 켠다. '데이터 로밍 시 요금이 부과됩니다.' 네. 그래도 확인. 문자를 다운로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