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재에서 2
이골이 날 법도 한데 하트를 파는 일은 언제나 즐거워. 그동안 죽자고 똑같은 모양의 하트만 파내고 있었다면 아마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트라고 다 똑같은 하트는 아니잖아. 로미오와 쥴리엣 같은 사랑이 있는 반면 이몽룡과 성춘향 같은 사랑도 있는 것처럼 하트 문양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와 견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이 있거든.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뻔하디 뻔한 사랑 이야기도 쉽게 외면할 수 없는 것은 그게 그것 같은 이야기더라도 하나하나의 이야기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기 때문이야. 죽음도 불사하는 운명과도 같은 사랑,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한 사랑, 돌고 돌아 기어코 맺어지고야 마는 사랑...
하트 문양 또한 마찬가지야. 사진에서처럼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하트도 있는 반면 날씬하고 길쭉한 하트도 있을 수 있고, 사발만큼 큼직한 하트도, 콩알만한 하트도 있을 수 있어. 그 하나하나가 풍기는 분위기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지. 그러니 어떻게 하트 파는 일이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
요즘에는 어쩐지 동글동글하고 조금은 넉넉한 모양새의 하트가 끌려. 강퍅하고 모진 사랑도 매력적이지만 아기자기하고 생각만 해도 절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따뜻한 사랑이 그립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내 사랑이 더 크네, 네 사랑이 더 넓네 아웅다웅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넉넉한...
균형이란 이를 테면 질서와 같은 것이야. 질서라고 해서 줄 세우는 것만 떠올리면 곤란해. 그렇다면 차라리 질서 대신 조화라고 하자. 하여튼 이게 무너져서는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세상사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하트를 파는 데서도 그래. 의도적이지 않는 다음에야 좌우로 균형이 잘 잡혀야 해. 찌그러진 하트는 따로 말할 것도 없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너무 크거나 작은 것 또한 만드는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조차도 불안하게 해.
그렇다고 좌우대칭이 완벽할 필요까지는 없어. 그건 또 너무 완벽해서 불안하니까. 물론 완벽한 좌우대칭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그걸 쉽게 뚝딱 만들 수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어떻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건 또 자연스럽지도 못하니까. 얼핏 보기에 완벽한 좌우대칭일 것 같은 사람 얼굴조차 비대칭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그게 어디 사람 얼굴뿐이겠어?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이고 조화야.
균형과 조화란 말도 그렇지만 '완벽하다', '완전하다'는 말처럼 매력적인 것도 드물어.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멈출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말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하다, 완전하다'는 말에 홀려 자기 생을 담보 잡힌 이들이 부지기수일 거야. 이렇게 말하니 '완벽하다, 완전하다'는 말을 폄하하는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다만 정도의 문제겠지. 균형과 조화만이 전부가 아니듯 '완벽하다, 완전하다' 또한 전부가 아니란 거지. 물론 '완벽하다, 완전하다'에 경도된 이라면 화를 내며 그게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답해 주고 싶어.
조금 비뚤배뚤하면 어때? 상처 좀 있으면 어때? 그게 사람이잖아?
철없던 한때 우화등선(?)을 꿈꿨어. 무념무상의 절대적 경지를 동경하던 그때를 이제 와 생각하면 너무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자꾸 도망갈 궁리만 했던 거지 다른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 창피한 줄은 알아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했던 거지. 그래도 그 덕에 여태 마음 하나만큼은 잘 다스려 왔어. 가슴속에서 불씨 하나가 틈만 나면 활활 타오르려 하는 걸 지금껏 잘 다독이며 편안히 웃음 지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그 불씨가 요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커져 버렸어. 황톳물이 콸콸 흐르는 개울가 다리 위를 서성일 때처럼 불안불안해.
파계한 수도승이 이런 심정일까? 십 년 수절 도로아미타불이 된 청상과부의 마음이 이럴까? 파계한 김에 염치고 뭐고 다 벗어던지고 세상의 끝을 향해 내달려볼까? 십 년 수절도 도로아미타불이 된 마당에 이 남자, 저 남자 원 없이 사랑이나 나눠볼까?
이도 좋고, 저도 좋은데 일단은 하트 좀 몇 개 더 파고 나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연필로 나무 위에다 동글동글 오동통한 하트를 그린 다음 톱으로 조심조심, 헛손질해서 상처 나지 않게...
귀뚜라미 우는 소리 요란한 깊은 가을밤, 쓱싹쓱싹 톱질 소리는 참 정겹기도 하지? 작업장 그득 풍기는 이 나무 향은 또 어떻고?
놀러 와. 작업장 앞마당에 잔뜩 달린 호두들이 어서 따가라고 아우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