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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6. 2019

산티아고 순례길 11일차

나헤라(Nájera) - 그라뇽(Grañón)

11일차


9. 나헤라(Nájera) - 그라뇽(Grañón) (27.77km)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


미워하기 전에 이해하려 노력하자.

그래서 결국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


이제 매일 다섯시 전에 일어나서 출발한다. 오늘도 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길을 나섰다. 항상 그렇지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어슴푸레한 햇빛 덕분에 랜턴이 필요 없어진다.

순례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라 항상 등 뒤에서 해가 떠오르는데, 해가 떠오를 때 쯤이면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도 길을 가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데,

어느 순간 노을이,


주황색 햇빛을 받은 구름은 마치 파도치는 물결 같았고

푸른 배경의 하늘은 바닷물 같아서

하늘을 보면서도 바다를 떠올릴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마냥 자꾸 뒤돌아보며 노을을 보면서 걷다가,

지도 앱을 켜보니 엉뚱한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온 건지 알 수도 없고, 되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온 거 같아서 일단 맵을 보면서 걷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한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스페인어라서 못 알아듣긴 했지만 분명히,

너네 왜 여깄어?

산티아고 가는 길은 저~~쪽인데?

이러셨다.

원래 같으면 뒤에서 비추고 있어야 할 태양이 오른 편에서 비추고 있었고, 그렇게 계획에 없던 알레산코라는 마을을 거쳐 6킬로 정도를 돌아 화살표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부근 하늘은 비행기가 고도를 오르내리는 구간인지, 여러 비행기들이 하늘에 구름 낙서를 남기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걷는 도중 만난 아주 작은 바에서는 너무너무 귀여운 강아지가 있었는데, 내가 주는 바나나에는 하나도 관심을 안 주고, 헤어질 때는 너무너무 아쉬워서

나는 너랑 헤어지는 게 너무너무 아쉬운데 너는 안 아쉬워? 하고 물어보는데도

슝, 하고 다른 데로 가버렸다ㅜㅜ


걷는 도중 마주친 꽃길은 너무 이뻤고 이 길 위에서 파리채 아저씨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때마침 그 아저씨 옆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스페인 사람이 있어서, 대체 저 파리채는 뭐냐고 물어봤더니,

그 파리채 아저씨는 바르셀로나보다 더 먼 곳부터 이 길까지 걸어오셨고, 그 길 중간에 강을 따라 걷는 구간에서 모기가 너무 많아 전기 파리채를 챙겨오셨다고 했다. 산티아고까지 가면 무려 1600킬로를 걷는 거라고.

파리채 아저씨는 그 길로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저 멀리 앞장서 멀어졌다.


파리채 아저씨의 이야기를 전해준 스페인 사람은 후안이라는 친구였는데, 바르셀로나 옆인 사라고사라는 집에서부터 걸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거의 1100킬로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9년 전에 이 길을 한번 걷고 또 걷는 거라고. 본인 직업은 경찰인데 잠깐 휴가를 내고 길을 걷는 중이라고 했다.

이렇게 종종 외국인과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있는데, 내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말을 이어가지 못할 때마다 너무 자괴감이 든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기로 오늘 결심했다.


오늘 도착한 마을은 Grañón이라는 작은 마을인데, 마을 초입 간판에 ‘14:00 Rock party’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예약해두었던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씻고 바로 나왔다. 푸드트럭 하나와 몇 개의 테이블, 그리고 기타연주와 노래.

삼십 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여유 있는 시간을, 그것도 이렇게 공을 들여서 지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 진짜 맛있는 핫도그와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살면서 가끔, 지금 이 순간은 정말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금 시간이 멈춰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


저녁에는 알베르게에 모여 간단히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늦게 도착한 일행들이, 오늘 오는 도중에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도로에 나갔는데 지나가던 외국인이 와서는

자기들이 길을 잃어서 헤매는 줄 알고 도와줬다고, 그래서 눈치 보여서 히치하이킹을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진짜 엉엉 울면서 웃었다.


오늘 너무 많이 걸어서 지치긴 했지만, 웃을 일도 너무 많아서 기억 상자에 사진을 많이 담은 날이다.


-


Albergue Ave de Paso


가정집을 알베르게로 사용하는 듯한 건물.

주인아주머니는 이쁜 아가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계심.

자리가 많이 없기 때문에 여러 명일 경우 미리 예약하는 걸 추천.

네시쯤 되면 주인분이 그냥 집에 가버리는데, 그래서 그 이후에는 그냥 머무는 사람들끼리만 집에 남게 됨.

샤워실이 하나지만 일반 가정집 크기의 샤워실을 생각하면 됨. 취사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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