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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6. 2019

산티아고 순례길 14일차

아타푸에르카(Atapuerca) - 부르고스(Burgos)

14일차


12. 아타푸에르카(Atapuerca) - 부르고스(Burgos) (19.8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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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거야.

함께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015B -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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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어째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나.

신은 어째서 인간에게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살인할 의지를 갖게 만들었는가.

신은 인간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말하면서도 왜 신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는가.

신은 왜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래서 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끔 만들었는가.


이 순간 나를 죽이거나 살리는 건 신의 몫이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건 순전히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은가.

내 앞에서 쓰러져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거나 혹은 매정하게 뿌리치고 지나쳐 갈 자유는 신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온전한 나만의 자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내 인생의 의미는 이 자유에서 찾아야 한다.

신조차도 간섭할 수 없는, 오롯이 내가 마음먹고 움직이는 대로 내 인생 한 조각 한 조각은 그렇게 끼워맞춰진다.


신은 인간의 목에 방울을 매달아놓지 않았고,

그렇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에게 자기에 대한 믿음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오롯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


느긋하게 일어났다. 걷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이제는 익숙하다. 마을을 벗어나 약간의 언덕을 오르고 나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노을이 하루를 시작하는 선물 같은 느낌이다.

언덕을 다 오르고 보니 넓은 공터로 된 길이 나온다. 그곳에 생각지도 못했던 십자가가 우뚝 솟아있었다.

십자가와 그 뒤로 하늘과 육지의 경계를 빨갛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 누구라도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진짜 너무너무 여유로워서 한량마냥 느릿느릿 걸었다. 시원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

중간에 바에 들려 딸기바나나 쥬스를 마시고, 전선 줄에 걸려있는 신발을 보며, 저 신발을 걸어놓고 즐거워했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부르고스 초입에 들어섰다. 버거킹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3킬로를 넘게 걸어야 된다. 한참을 걸어서 버거킹 앞에 도착했는데, 버거킹이 아직 안 열어서 바로 옆에 있는 맥도날드에 갔다. 와우, 빅맥 맛은 전세계가 똑같구나.

맥도날드에서 알베르게까지 4킬로를 더 걸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대부분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길래 나도 버스를 탔다. 진짜 오랜만에 타는 이륜 장치.

고작 1.2유로에 4킬로를 넘게 데려다주다니 개이득이다.


부르고스는 꽤나 큰 대도시인데 부르고스 대성당으로 유명하다. 평소처럼 숙소에서 쉬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바로 밖으로 나갔다.

성당을 쭉 둘러보다가 성당 앞 광장에서 레몬 스무디를 하나 시키고 멍하니 사람 구경을 했다.

여행을 온 사람, 순례길을 걷는 사람, 동네 주민, 일하는 사람...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는 동상이 앉아있는 벤치가 있었는데, 내가 멍하니 그쪽을 쳐다볼 때마다 혼자 온 여행객들이 자꾸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부탁이지만 그래도 이왕 찍어주는 거 잘찍어주고 싶어서, 쭈그리고 앉아서 이 각도 저 각도로 찍어주고는 건네줬다.


구글맵을 보니 근처에 ZARA가 있길래 속옷을 하나 사려고 갔다. 근데 속옷은 없고 다른 옷밖에 없었다. 옷을 안 챙겨 와서 뭘 입어도 먼 길 걷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싫어서 온 김에 옷을 하나 샀다.

사자마자 겉옷을 갈아입고, 다시 돌아다녔다. 맛있다던 요거트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너무 뜨거워져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노곤노곤한 상태로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반 정도 낮잠을 자고, 더 잤다간 밤에 잠을 못 잘까 봐 일층에 내려가서 책을 읽었다.


저녁은 중국식 뷔페를 가려고 했는데 계획을 바꿔서 근처 레스토랑으로 갔다. 여럿이 이것저것 시켜 먹었는데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아서 많이 먹었다.


오늘까지는 매일 보던 사람이 비슷비슷했는데, 내일부터는 정말로 발 멈추는 곳이 그날 머물 마을이라 앞으로 다시 보게 될지 못 보게 될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직감했는지 마주치는 서로마다 시원섭섭한 인사를 건넨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자기 전에는 알베르게 뒤 전망대에 올라가서 부르고스 전역을 내려다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본다. 사실은 일몰을 보려고 올라갔는데, 해가 전망대 반대편으로 지는 바람에 일몰을 보지는 못했다.

숙소로 돌아와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나는 일기를 쓰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일을 위해서 서로 잠자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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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a de los Cubos Pilgrims Hostel


엄청 큰 공립 알베르게

일층에 쉬거나 떠들거나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자판기도 있다.

침대는 평범하고 화장실은 각 층에 남녀 화장실 하나씩, 샤워실은 다섯 개씩 있다.

밤 열시 반에 문을 닫고 새벽 여섯시에 문을 여는데,

다섯시 사십분쯤에 문을 열어주신다. 그전에는 출발하고 싶어도 못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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