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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7. 2019

산티아고 순례길 15일차

부르고스(Burgos) - 온타나스(Hontanas)

15일차


13. 부르고스(Burgos) - 온타나스(Hontanas) (31.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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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주 크게 웃고 있겠지요. 당신이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도 웃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거죠.

사람에겐 바보 같은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가장 바보 같은 놈은, 내 생각에는 바보 같은 구석이 없는 놈일 것입니다.”


카잔차키스 -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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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서 숨을 헐떡거리며 걸어가는 사람.

하지만 자기가 그 자리에 영원히 속해있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한 순간이란 걸 깨닫는다면 웃으며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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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려고 했는데 여섯시부터 알베르게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괜히 일찍 일어났어.

그래도 사십분쯤 직원분이 문을 열어줘서 출발할 수 있었다.

출발하자마자 아깽이 한 마리를 봤다. 엄마는 아가 혼자 내버려 두고 어딜 갔는지ㅜㅜ

아직 새벽이라 추워서 그런지 자꾸 기침을 하는 아깽이를 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안해 아깽아ㅜㅜ


오늘은 하루 종일 혼자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고, 일부러 다른 사람들과 뭉치지 않았다.

혼자 길을 걷고 있으면 온전히 내 자신이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느낌이지만, 하나 둘 모여 그룹이 생기고 그 무리 안에서 길을 걸으면, 마치 정해진 울타리 경계 안에서만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느낌이라 그게 싫었다.


넓은 초원을 혼자 걷는다. 바람이 계속 불다가 마침내 소리를 얻어 어디선가 말을 걸어온다. 노란색 보리밭은 햇빛에 적셔져 황금 빛깔을 뽐내고 있다.


유럽의 올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 예상된다는데, 진짜로 오전 열 한시만 돼도 햇빛이 뜨거워진다.

이렇다 보니 바를 만날 때마다 얼음에 콜라 한 잔이 필수다. 아마 오늘 하루만 콜라를 일 리터 정도 마신 거 같다.


걷다가 목이 마를 때면 배낭 오른편에 꽂아둔 물병을 꺼내 마신다. 물병 속 물이 아직 차갑게 느껴질 때면 아직은 더 걸을 만하다는 뜻이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햇볕을 등 뒤로 받다 보면 메고 있던 배낭은 온기를 넘어 열기를 머금기 시작하고, 그때 물병 속 물을 마시면 따땃한 물을 마실 수 있다.

이건 오늘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점심시간 즈음 되어 마을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적당해 보이는 알베르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씻고 나서 너무 피곤해 빨래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전날같이 걸었던 일행 한 명이 ‘일찍 도착하셨네요?’하면서 들어온다. 그걸 시작으로 한국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애매한 시간에 점저로 피자를 먹고, 너무너무 더워 밖에 나갈 생각을 안 하고 책을 읽었다.

일곱시쯤 되어 일층으로 내려가 맥주 한 캔을 사는데 같은 방을 쓰는 후안이 말을 건다.

아까 우리방에 도둑이 들어왔었다고,

걔가 돈이랑 훔치려고 했는데 내가 쫓아가서 잡았다고,

지금 경찰서에 있다고,

놀라서 진짜냐고 묻는데 후안 직업이 경찰이기도 하고, 사진까지 보여주는 거 보니 진짜인 거 같다.

와웅...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간 사이에 도둑넘이 내 핸드폰을 훔치려고 했단다. 큰일 날뻔 했다. 고마워요 후안.


날씨가 너무너무 덥다. 우리나라처럼 습하게 덥진 않지만 가장 뜨거울 때는 35도 정도는 가뿐히 넘어버린다.

그래서 이제는 새벽 일찍 출발할 생각이다. 이제부터는 드넓은 초원 길이 나오는데, 새벽부터 별 구경을 하면서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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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gue Santa Brígida


양팔에 문신을 하고 단단하게 생긴 직원분이 너무너무 친절하시다.

일층에서는 bar도 같이 운영하고 있어서 군것질하기도 편하다.

피자는 6유로인데 맛도 괜찮다. 콜라 뚱캔도 1.3유로인데 얼음컵을 달라고 하면 같이 받을 수 있다.

샤워실이 엄청 넓어서 씻기 편하고 매트리스도 푹신푹신해서 좋다. 6인 1실.

다만 와이파이가 잘 안 잡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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