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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7. 2019

산티아고 순례길 17일차

프로미스타(Frómista) - 칼자딜라(Calzadilla)

17일차


15. 프로미스타(Frómista) - 칼자딜라 데 라 쿠이자(Calzadilla de la Cueza) (33.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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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행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자기가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거짓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거짓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을 범하지 말아야지요.

자기가 지금 거짓을 행하고 있지 않은지 한 시간마다, 아니 일분마다 반성해보십시오.”


도스토예프스키 -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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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하기.

누구나 내 생각에 쉽게 자국을 남길 수 있도록.

이런 생각을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항상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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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하는데 내 앞자리에서 자던 미국인 아저씨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랜턴을 챙겨들고 어두운 길을 비추며 가는데

다시 또 쏟아져내리는 별들,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가슴에 담아둔 장면이었다.

그렇게 계속 걷는데, 아무도 없다.

앞서는 사람도, 뒤에 따라오는 사람도,

혼자서 어둠 속 랜턴에 의지한 채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외로움보다는 고독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거 같은 이 시간.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싫어서 일부러 혼자 걷고 있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냥 주변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계속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지 굉장히 애매한 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무는 까리온까지는 16킬로만 걸으면 되고, 그다음 마을인 칼자딜라까지는 까리온에서 17킬로를 더 가야 되는, 아주 짧게 가거나 아주 길게 가거나.


까리온에 아침 여덟시 무렵 도착하는 바람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칼자딜라까지 가자는 마음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나를 본 종업원은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냠냠?’ 거리는 시늉을 했고,

나는 ‘응!’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을 했다.

초코우유와 오렌지쥬스, 치즈와 햄이 들어간 토스트로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섰다.


17킬로에 이르는, 초원밖에 없는, 이제는 해도 쨍쨍한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길을 가는데 갑자기 먼지에 뒤덮인 차가 내 옆에 멈추면서 ‘굿모닝!’ 인사를 한다.

그 순간 ‘뭐지? 인신매매 납치인가? 이 시간에?? 아닐 거야 그러면 혹시 나를 다음 마을까지 태워주려는 마음씨 착한 아저씨???’ 이런 온갖 생각을 하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 길 중간에 있는 바를 광고하는 아저씨였다. 딱 중간지점, 그러니까 9킬로 부근에 Oasis라는 바가 있다고, 식사도 할 수 있고 음료수도 있다고, 걷다가 오른 편에 건물이 보이면 그 뒤에 바로 나온다고, 그러니까 도중에 푸드트럭에서 뭐 사 먹지 말고 여기 와서 사 먹으라고.

알겠다고 대답한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더웠다. 유럽 전체가 폭염이란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나보다 앞서 걷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고 그 사람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무 그늘이라도 나오는 순간에는 잠깐 앉아서 쉬었는데, 그럴 때마다 지나쳐가는 자전거 순례자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자전거 타면 30분이면 도착할 텐데...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중간에 푸드트럭을 만났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아저씨의 말대로 푸드트럭을 지나쳐 또 한참을 걸었다.

결국에 도착한 Oasis, 이름을 참 잘 지었네, 생각했다.

샌드위치와 콜라를 마시고 쉬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쯤 한 한국인 할머니를 만났다. 46년생으로 정정하신, 혼자서 길을 걷고 계셨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길에 말동무와 함께 가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이 할머니도 같은 숙소에 머물 예정이라고 하셨다.

씻고 나서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오른쪽 발뒤꿈치가 따끔거렸다. 만져보니 헐, 물집이 생겼다. 나는 안 생길 줄 알았는데, 순례길 위에서 처음 물집이 생겼다.

곧바로 째고 밴드를 붙이려고 하는데, 옆에 자리를 한 할머니께서 이거 바르면 괜찮다면서 안티푸라민을 내 발에 막 발라주신다.

나는 그냥 째고 밴드 붙이고 싶은데...

그래서 그냥 밖에 나와서 혼자 째버렸다.


작은 마을이라 마땅히 사 먹을 데도 없고 그래서 자판기에서 냉동을 뽑아 저녁으로 먹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근데 진짜 너무너무 더워서 제일 더울 시간에는 38도 정도까지 오른다. 바람마저 뜨겁고 햇빛에 잠깐이라도 서 있으면 큰일날 거 같다.


그래서 내일도 새벽 네시 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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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zadilla de la Cueza Pilgrims Hostel


공립 알베르게. 너무 더워서 잠을 못 잠.

주방도 없고 주변에는 작은 마트밖에 없음.

시설은 그냥저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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