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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7. 2019

산티아고 순례길 19일차

베르시아노스(Bercianos) - 만시야(Mansilla)

19일차


17.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26.1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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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갈길은 아직 머니까.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우린 이미 오래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니까.”


이적 - 같이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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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을 걸으면서 가장 힘든 게 뭔지 알아?

— 음... 멀리까지 걸어가야 될 때?

— 아니, 잠깐 제자리에 멈춰서 쉬는 거. 그게 제일 어려워.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어. 어떤 사람은 걸음이 빠르고, 어떤 사람은 아주 느린 걸음을 가지고 있지. 또 어떤 사람은 큰 보폭을 가지고 있고, 다른 어떤 사람은 작은 보폭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이 길을 걷고 있노라면,

누구는 정말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가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지나쳐가 다시는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 그게 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쳐갈 때면 나는 ‘혹시 지금 내 걸음이 너무 느린 건가?’하고 생각해. 그러고는 조금 더 속력을 높이려고 일부러 빨리 걷기 시작하지.

이뿐만 아니야. 해가 높이 떠오르기 전에 먼저 도착해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어. 게다가 정해진 일정에 맞춰 도착해야 된다는 생각도 내 걸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야.

그러다 보면 마음 편하게 쉴 생각을 못 해. 벤치 옆을 지나면서도, ‘아직 걸을만하니 조금 더 참고 걸어보자.’ 생각하며 그냥 지나쳐버리지.

그러다 한번, 얼마 지치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나타난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거야.

그제서야 지금껏 걸어온 길가 옆에 나무 생김새가 눈에 들어오는 거지. 나무기둥 색깔이며, 잎사귀의 모양이며 하는 것들.

동시에, 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 모습도 보이기 시작하고, 심지어 저 멀리 길게 늘어진 전깃줄의 개수마저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저 멀리 눈길 닿는 곳까지 바라보다 보면, 어느샌가 그런 생각들이 없어지는 거지. 오늘은 어디까지 가야 된다느니, 해가 곧 뜨거워진다더니 하는 것들이 말이야.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다른 것들이 차올라. 사랑, 행복같이 품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로.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잠깐이지만 어른의 기분에 잠겨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돼.

그렇다고 하루 종일 앉아서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어. 날이 너무 뜨거워지면 정말이지 걷다가 쓰러지게 될 수도 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리면 오늘 밤에 몸을 뉘일 자리도 찾기 힘들어지니까. 이렇다 보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거야.

언제까지고 이상에 머물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이거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그걸 위해서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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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방을 쓰던 외국인 아저씨는 새벽 네시에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이제 마지막 날까지 30킬로 이상 걷는 날이 없을 거 같아서, 조금 늑장을 부리다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침실.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불을 켠다. 부스럭거리며 짐을 챙기고, 편하게 출발 준비를 했다.


아직도 한밤중이었고 이제는 그믐달이 되어버린 달이 정말 너무너무 이쁘게 내가 머물렀던 알베르게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시작부터 첫 마을이 7킬로나 떨어져 있어 꽤 걸어야 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커피 한잔 마셔야겠다, 생각하며 한참을 걷다가 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는데, 바로 입구에 바가 하나 있었다. 차도 한복판에 테이블이 있는 걸 보고서는 다른 바에 가서 마셔야지, 하고 지나쳐갔는데 그게 유일한 바였을 줄이야.

다시 돌아가긴 그렇고, 배는 출출하니 바로 마주친 벤치에 앉아 전날 사두었던 바나나와 빵을 먹었다.


오늘은 느리게 걷고 쉬어가는 것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원래 걸음이 정말 정말 느린 사람인데, 지금은 같이 걷던 사람들보다 거의 하루가 차이 날 정도로 앞서 걷고 있다.

처음 길을 나설 때는 최대한 느리게 걸을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서두르며 걷고 있나 고민했다.

이제 길은 절반도 채 남지 않았고, 이전처럼 먼 거리를 걸을 일도 없을 거 같아서 오늘부터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정말 흐느적흐느적, 평소의 나처럼 걸었다. 계속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 다섯시, 여섯시에 도착할 정도로 느리게 걷고 싶지만, 날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더워서 그렇게 걸었다간 산티아고보다 저세상을 먼저 갈 거 같아 그러지는 못했다.

벤치가 나올 때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한참을 멍 때리기도 하고, 신발끈을 고쳐 매기도 했다.

목적지 이전 마을에서는 바에서 한참 동안이나 앉아서 쉬었다. 쥬스랑 커피랑 콜라랑 크로아상을 먹으면서.

남은 거리는 6킬로. 날이 벌써 더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늘이 없는 벤치에서는 쉴 수가 없다. 걸으면서 날씨가 더 좋을 때 왔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한가득한 생각을 했다.


드디어 도착한 마을 위에는 멋진 구름이 떠있었고, 숙소 주인분들은 ‘웰컴 홈!’이라면서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일요일이라 주변 마켓이 안 열어서 주유소에 딸려있는 편의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그러고 나서 낮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이제는 이 시간에도 더워서 낮잠 자는 것조차 힘들다.

낮잠을 포기하고 그동안 적어두었던 글들을 정리했다. 조금이라도 기억이 선명할 때 이 감정들과 장면들을 남겨두기 위해.


저녁식사를 아까 사온 냉동 미트볼로 때우고 선선해져 자기 편해질 때까지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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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gue Gaia


각 방에 10개, 8개 침대가 있다. 시설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인분들이 친절하시고, 이것저것 챙겨주려 하시는 모습이 보인다. 예를 들면 낮잠 자는 사람들을 위해 불을 꺼주시는 모습.

주방에서는 취사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다음날 아침 6시에 조식을 먹을 수 있다. 여기서 머무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 다음날 목적지가 레온이기 때문에 조식을 먹고 나서 느긋하게 출발하면 좋을 듯. 아침식사 비용은 도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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