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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7. 2019

산티아고 순례길 20일차

만시야(Mansilla) - 레온(León)

20일차


18.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 레온(León) (18.5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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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어디까지 가는 건지는 몰라도

쉬어갈 곳은 좀처럼 보이지를 않아도

예전에 보았던 웃음들이 기억에서 하나 둘 사라져도

좋았던 그 시절의 사진 한 장 품에 안고

마냥 걷는다.”


장기하와 아이들 - 마냥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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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회사 심지어 순례길에서조차 휴일 하루 전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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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도시 레온에 가는 날!

거리도 짧고, 레온에서 하루 쉬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엄청 엄청 느긋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머물렀던 알베르게에서 아침식사를 준다고 해서 여섯시에 일어나 커피랑 빵을 먹고 천천히 출발했다.

와, 이렇게 느긋할 수가. 노을은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내 마음을 콕콕 찌른다.


진짜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걸었다. 항상 두 손에 들고 다니던 스틱도 접어서 배낭에 넣고, 아무것도 안 든 채 흥얼흥얼 거리며.

내가 좋아하는 향기 가득한 노란 꽃도 보고, 그늘 아래 앉아서 어제 사둔 빵을 먹으면서 잠시 쉬기도 하고, 동네 한복판에 알록달록 이쁜 놀이터도 지나쳤다.


터벅터벅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오른 편에 테이블이 나온다. 음료수랑 바나나가 놓여진 채 아무도 없는 테이블. 이 길 위에서 이런 호의를 만날 때마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진다.


느릿느릿 쉬엄쉬엄 걷되, 끝까지 걷기.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다.

이런 재밌는 낙서를 볼 때마다 기분도 좋아지고, 나도 낙서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전부터 보이던, 온통 보랏빛을 가지고 있는 꽃 사진도 잠깐 멈춰서 찍고, 노랑과 파랑의 조화가 왠지 청량한 느낌이라 이것도 한번 찍고, 귀여운 하트 사진도 찍었다.


도시에 들어오니 캔터키 할아버지의 맛 좋고 익숙한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마침 점심때이기도 하고 간만에 치맥을 먹어보나 했는데, 오후 한시부터 영업 시작이다. 왜 이렇게 늦게 여는 거야...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다시 걷는다. 레온이라는 도시는 옛날 레온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부르고스처럼 엄청 큰 성당이 있다.

예약해둔 숙소가 오후 두시에 체크인이라서 성당 앞 바에 가서 맥주를 시켰다.

스페인에서는 술을 시키면 안주를 꼭 같이 내준다. 옛날부터 이어져온 관습이라나 어쨌다나.

그래서 보통 와인 한 병을 시키면 타파스라고 하는 음식을 같이 내주는 게 보통이다.

이번에도 맥주 한 잔을 시켰더니 간단한 안주거리를 같이 줬다. 참 좋은 문화다ㅋ_ㅋ


맥주를 마시고 나니까 졸립다. 성당 옆 박물관에서 쎄요를 받고, 가우디가 만들었다는 보타네스 저택에 가서도 쎄요를 받았다.

출금을 하러 atm기를 찾으러 가고 있었는데 첫날부터 종종 마주치던 미국인 아저씨를 여기서도 마주쳤다. 서로 보자마자 넘나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부터 하면서 서로 어디 가는 길이냐고 안부를 묻고선 헤어졌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이면서ㅋㅋㅋㅋㅋ. 돌아다니는 길에 눈에 들어온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카라멜 모카를 시켰다. 간만에 익숙하고 달달한 커피.

도로 옆 테라스에 앉아서 약간은 졸린 상태로 멍하니 커피를 마시고있자니, 아무래도 도시가 좋긴 좋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욕조가 있길래 따땃한 물에 몸을 푸욱 담갔다. 그리고 낮잠을 자고 바깥 구경을 나갔다. 숙소 오기 전 주변을 다 둘러봐서 그런지 딱히 새로운 건물은 없었고,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사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래도 저녁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서 쉬었다.


오늘 내일 지내는 이 숙소는 커다란 개 두 마리랑 아기 고양이가 같이 사는 집이다. 이 귀여운 아기 고양이 이름은 리아. 리아는 쪼꼬맹이 주제에 자기보다 몇 배는 큰 아레스(알뤠스, 스페인 발음에 있는 L자 발음 이랬다)한테 계속 장난을 건다. 너무너무 귀엽잖아...

리아랑 아레스는 형제처럼 맨날 티격태격하고, 리아랑 겔라는 엄마 자식처럼 토닥토닥하는 사이라고.

졸려서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아레스는 내 허벅지를 자꾸 베개 삼아 눕고, 리아는 자꾸 내 손가락을 깨물며 장난을 친다.

(싸우는거 아님)


근데 갑자기 해가 쨍쨍한데 폭우가 쏟아진다. 다비드와 같이 밖에 널어두었던 빨래를 안으로 들이고 우산을 빌려서 저녁을 먹으러 밖에 나왔다.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중식 뷔페를 먹으러 왔다. 맛있긴 한데 매콤한 음식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간만에 배불리 먹고 나서 숙소에 오자마자 피곤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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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ortable y espaciosa hab a 5 min de la Catedral(에어비앤비)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한 숙소. 큰 개 두 마리와 아기 고양이가 있다. 호스트가 사는 집에 방을 하나 빌리는 식인데, 침대도 넓고 쉬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호스트는 정말 친절하고, 간단한 과일이나 간식도 준비되어 있다. 레온 대성당까지는 걸어서 7분 정도 거리. 아기 고양이가 정말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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