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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8. 2019

산티아고 순례길 24일차

무리아스(Murias) - 폰세바돈(Foncebadón)

24일차


22. 무리아스(Murias de Rechivaldo) - 폰세바돈(Foncebadón) (20.8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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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에밀리 디킨슨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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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을 때 남몰래

현실과 꿈 사이 경계선을 흐릿하게 지워주세요.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현실에서 꿈을 살고,

꿈속에서도 현실을 살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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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와 함께 온 엄마는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아직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가를 품에 쌓은 채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준비를 하고 해가 뜨기 직전에 출발했다.


발이 빠른 배우님은 나를 지나쳐 뒷모습마저 안보일 정도로 금방 멀어져갔다. 간만에 혼자 걷는 길 위에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했다. 같이 걷는 것도 재밌지만 혼자 걷는 게 더 좋다는 생각, 사랑하는 연인이랑 이 길을 걷는다면 정말 행복하겠단 생각.


결국엔 모든 게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것도, 이쁜 아가에게 웃으며 장난을 치는 것도, 못 알아듣는 줄 알면서도 마주치는 동물들에게 말은 건네는 것도, 양보를 하는 것도, 질투를 하는 것도, 아쉬워 하는 것도 모든 게 다 결국엔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가장 이유를 알기 어려우면서도 지속적인 사랑으로 나타나고, 연인끼리 하는 사랑은 제일 분명하고 강렬하게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이렇듯 모든 행동들은 사실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옆으로 스페인 국기를 단 채 지나가는 자전거 순례자가 인사를 건넨다. “Buen camino!”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주고받은 이 인사 속에, 서로 습관처럼 건네는 이 인사 속에 얼마나 착하고 기분 좋은 마음씨가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때 왼쪽 맞은편 도로에서 하얀색 차 한 대가 내 쪽으로 빠르게 가까워진다. 보통 빠르게 지나가는 운전자가 인사를 건네는 경우는 드문데, 운전석에 있던 할아버지는 창문을 내린 채 손을 흔들면서 지나간다.

온정이 넘치는 이 길 위에서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한가득 차버린 마음이, 한 사람이 지나가며 흔드는 손짓에 갑자기 흘러넘쳐 버렸다. 갑자기 터진 눈물에 혼자 엉엉 울면서 걸었다. 되돌아보니 이 길 도처에는 사랑이 발에 채고 있었구나, 사실은 모든 게 사랑이었구나, 동시에,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흐느적 걷고 있었는데, 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

너 발걸음이 왜 이렇게 느리냐고,

어디서 왔냐고,

언제까지 도착하는 일정이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이 얘기가 나와서 대답해줬더니 그거 국제식 나이냐고, 한국식 나이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국제식 나이라고,

난 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한국식 나이보다 두 살이 어리다고,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살인데 12월에 난 아기는 한달만 지나도 두살이라고, 알려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오늘 목적지가 나보다 10킬로나 더 먼 줄리아는 느릿느릿한 내 발걸음에 인사를 남긴 채 앞장서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짧은 거리였다. 덕분에 쉬고 싶을 때 부담 없이 쉬었다. 바에 앉아서 한참 고양이랑 놀기도 하고, 그늘 밑에 판초를 깔고 앉아 오랫동안 일기를 쓰기도 하면서.

오늘 도착한 마을에는 맛있는 피자집이 있다고 해서 점심 겸 저녁으로 피자를 먹으러 갔다. 배우님이랑 엄청 큰 피자 한 판을 나눠 먹고 숙소로 왔다.


자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에 앉아서 맥주를 시켜놓고 책을 읽는데, 같은 숙소에서 머무는 한국인 아저씨를 만났다.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를 가지신. 그리고 퇴직 후 친구와 같이 순례길을 온 서른 초반쯤 되는 한국인 두 분.

배우님까지 다섯명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순례길에 온 이유며, 길을 걸으면서 각자 하는 생각들이며, 말 그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 마감 시간이 돼서야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순례길만의 매력, 평소에는 꺼내기도 힘든, 삶에 대한,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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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onvento de Foncebadón Hostel


깔끔하다. 바에서 보이는 바깥풍경도 멋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근처에 피자집도 있고, 바로 옆에 평점 높은 레스토랑도 있다.

이층침대 세개, 총 여섯명과 한방을 같이쓰고 각 방마다 화장실 겸 샤워실이 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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