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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8. 2019

산티아고 순례길 28일차

비야프랑카(Villafranca) - 오세브리오(O  Cebreiro)

28일차


26. 비야프랑카(Villafranca del Bierzo) - 오세브리오(O Cebreiro) (27.7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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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타는 듯 뜨겁게 드리우고 불붙은 구름이 서서히 침몰하면

어느새 새벽이 베일 듯 날이 선 채 다가오네

침묵은 돌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앞뒤 없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 기댈 곳도 없고 잡을 손도 없는 것

발 밑이 낭떠러지 같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나 혼자 어른의 기분

외로워 본 이는 사랑의 반대말들이

미움도 원망도 아닌 걸 알게 된다지요.”


심규선 - 외로워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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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한 치 앞 밖에 안 보이는 희뿌연 연무 속에 있는 기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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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행들과 다 같이 출발했다. 근데 얼마 안 가서 각자 걸음 속도에 맞춰 다 흩어졌다. 초반에는 도로 옆을 따라 걸었는데 후반에 가서는 오르막이 나왔다. 오늘 목적지 마을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곳이라 산 하나를 올라가야 했다.


평지에서는 느긋느긋 걷다가도 오르막에서는 느긋한 게 오히려 더 힘들어서 영차영차 열심히 올라왔다. 보통 나무가 우거진 산길은 벌레가 많아 별로지만, 오늘은 경치도 좋고 그늘진 길이 시원해서 좋았다.


산 중턱에 있던 마을에서는 오랜만에 얼음 잔에 콜라를 마시며 쉬었다. 곧장 졸음이 쏟아져서 꾸벅꾸벅 졸다가 너무너무 이쁘게 생긴 강아지를 만나 같이 얘기를 했다. 요즘엔 길가에서 귀여운 동물들을 만날 때마다 나랑 같이 집에 가자고 물어보는데, 아직까지 한 마리도 안 따라왔다.


오르막을 계속 오르면서 어제처럼 이쁜 구름들이 자꾸 눈앞에 있었고, 걸으면 걸을수록 더 가까워졌다.


드디어 레온 지역에서 갈리시아 지역에 진입했다. 이 말인즉, 이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매일을 기록하고, 마음에 담아두는데도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는 걸까?


도착하고 나서는 조금 쉬다가 내일 타고 갈 자전거를 예약했다. 그리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점저를 먹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혼자 책을 읽다 보니 심심해져서 밖에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숙소 뒤쪽 난간에 누워서 일기를 썼다. 해가 지는 방향을 보니 오늘은 처음으로 석양을 볼 수 있을 거 같아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해가 천천히 떨어지면서 산등성이를 점점 붉게 물들였다. 눈부시게 타오르던 태양은 달에게 새벽을 맡기면서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마지막 능선을 넘어가기 직전 해는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한 잔양만 전해주며 저물어 가고 있었다.

태양은 드디어 모습을 감추었지만 점점 더 붉어지는 노을빛은 시시각각으로 색깔을 바꾸며 태양의 마지막 인사를 대신 전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 오늘 처음 보는 석양은 정말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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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unta de Galicia O Cebreiro Pilgrims Hostel


규모가 큰 공립 알베르게. 시설이 좋지는 않지만 엄청 나쁘지도 않다. 신발도 침대 옆에 두는 분위기. 자판기가 하나도 없다.

숙소 뒤에 난간이 있는데 일몰을 보기 정말 좋은 장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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