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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5. 2019

산티아고 순례길 3일차

생장(SJPP)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3일차


1.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25.2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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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 - 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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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걸을수록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의미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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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방을 나왔다. 어제 만났던 일행들과 같이 출발하기로 약속한 터라 함께 길을 시작했다.

생장부터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길인데, 순례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힘든 길이라고 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걸으면서 너무너무 멋진 풍경들을 많이 만났다. 구름 사이로 주황색 커튼을 하늘하늘 펼쳐둔 햇빛도, 유치원 미술시간에 매일같이 그렸던 하얀 도화지 위에 무지개도.


하지만 오르막길은 너무너무 힘들었고,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라고 했던 윤종신 아저씨의 노래가 자꾸 생각났다.

계속 걷다 보니 어느덧 구름은 내 발밑에 있었고, 우리가 올라왔던 산봉우리들을 토닥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길 위에서 정말 많은 동물들을 만났는데,

꽃 밭에서 쉬는 동안 어딜 혼자 가는 건지 궁금했던 풍뎅이, 저 멀리서부터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이 길은 사람만 다니는 길이 아니라는 듯이 내 앞 길을 우두커니 막아섰던 말, 자가주택은 역시 얘네도 힘든 건가 생각하게 했던 길가를 가로질러가던 여러 민달팽이들, 그리고 양, 소, 나비.


순례길에서 처음 갈림길을 만났다. 왼쪽 길은 가파르지만 조금 더 짧은 길, 오른쪽 길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더 먼 길. 사람들은 각자 선택한 길을 걸었다.

자기가 걷는 길을 후회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소에 와서 샤워를 하고 쉬다가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푹 잘 생각으로 와인 반 잔을 들이켜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너무너무 추워서 총총거리며 앞사람이 들어가는 문에 뛰어 들어갔다.

근데 띠용, 여긴 숙소가 아니라 성당이잖아.

어차피 걷는 동안 꼭 한 번은 미사를 드려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들어가서 자리를 차지했다.

미사 마지막 즈음에, 원로님 한 분이 나와서 여행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시간이 있었다.(아마도 그전부터 계속 여행객들을 위해 기도해준 듯하지만)

모든 순례자들이 앞쪽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듣는데, 원로님께서 갑자기 세계 각국 언어로 모두를 축복해주셨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약간은 어눌한 발음으로,

“Korean.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종교가 인류와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지만 먼 이국땅에서, 그것도 너무 추워서 발발거리며 들어간 성당에서, 그것도 난생처음 드리는 미사에서 외국인에게 축복을 받다니.


매일 자기 전에는,

지금 함께하는 동행들과는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까?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동행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쉬움과 기대감이 부쩍 커지는 시간을 항상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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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cesvalles Pilgrims Hostel


론세스에는 알베르게가 한 군데밖에 없다.

거의 이백 명을 수용하는 건물인데, 여기가 꽉 차면 구형 건물에 자리를 배정받는다고 한다. 그마저도 없으면 가까운 마을에 가서 자야 된다고.

아직까지 알베르게가 어떤 분위기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잔다.

다 같이 모여 먹는 저녁식사는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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