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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5. 2019

산티아고 순례길 4일차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주비리(Zubiri)

4일차


2.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주비리(Zubiri) (21.3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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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옆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혼자서 백걸음 앞서가는 것보다는

한걸음 뒤로 가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Zabaldika 성 스테파노 성당 ‘순례자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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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잠깐 제자리에 앉아서 쉰다.

그러다 기운을 차리면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문득,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


너무 힘들어서 기절할 줄 알았는데 잡생각이 많아서인지, 다른 사람들 코골이 때문인지 잠이 안 왔다.

잠자기를 포기하고 전날 널어두었던 빨래를 챙겼다. 돌아와보니 내 밑 침대에서 주무시던 한국인 아저씨가 잠에서 깨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내 나이 또래에 결혼을 하셨고 지금은 두 아이가 있다고, 나는 취준생이라고 이야기했더니 자기도 취준생이라면서 웃으셨다. 원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시고 혼자서 순례길 여행을 오신듯 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이야기하시길

“저는 요즘 틀림과 다름에 대해서 생각해요.”


출발 전 자판기에서 물을 뽑았는데 생수병이 기계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옆에 있던 일행이 자기가 한 번 더 뽑아보겠다고 돈을 넣고 버튼을 눌렀는데, 아니 이게 뭐야. 물병 3개가 투두둑 떨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않았던 2+1 행사로 하루를 시작하다니 또 기분이 좋았다.

출발하는 길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명 금방 그칠 거야. 왠지 느낌이 그래.’ 생각하면서 우비를 안 입은 채로 출발했다.


어제 왔던 길과 달리 오늘은 여러 작은 마을을 지났는데, 가는 도중 배낭에 피켓을 단 채 걷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피켓의 내용은

‘No China Extradition’(범죄인 인도법 반대)

이 사람은 이어폰을 낀 채로 혼자 걷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더니 웃으며 ‘부엔 까미노’하고 인사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일행 한 명이 말을 걸었다.

홍콩 사람이냐고, 홍콩 사람이라고.

무슨 의미이냐고,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한다고.

시위가 심하지 않냐고, 친구들과 연락이 되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다고.

어떻게 되고 있냐고, 아홉시에 행정장관 기자회견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잘 해결되길 바란다며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먼 이국 땅, 사람들에게 화제를 알리기 위해 배낭에 피켓을 메고 걷는 그 사람을 보면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생각하면서도 혹시 중국인을 만나 시비가 붙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산속을 내려가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발밑에 돌덩이들을 보면서 걷다 보니 주변 풍경을 담을 여유가 별로 없었고,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다 보니 오늘 아침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다름과 틀림에 대해서.

문득, 살면서 틀릴만한 일은 별로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틀렸을 때, 은행 비밀번호를 틀렸을 때, 시험문제 정답을 틀렸을 때 정도를 제외한다면.

세상 모든 일은 틀리기보단 다른 경우가 훨씬 많다.

누구는 쿠앤크를 좋아하고 누구는 민트 초코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데 살면서 다름과 틀림의 엄청나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간과해버린다. 마치 다른 게 틀린 것처럼, 틀린게 다른 것처럼, 혹은 그 둘이 같은 것처럼.

그러다가 다른 걸 틀린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교정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일상은 답답해지고 힘들어지고 단순해진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짐을 풀고 쉬다가 일기와 여행기를 쓰러 혼자 근처 바에 갔다.

처음엔 맥주랑 츄러스를 시켰는데, 츄러스가 없다해서 대신 둥근 빵을 시켰다. 근데 존맛탱ㅋ_ㅋ


내일인 줄 알았던 U20 결승 경기가 알고 보니 오늘이었다. 띠용...내일 보려고 특별히 아파트까지 예약했는데

ㅎ_ㅎ

운 좋게도 오늘 묵는 알베르게 식당에 TV가 있었고, 더 운 좋게 축구 중계를 하는 채널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앞 레스토랑에서 피자, 스파게티, 립, 파에야, 소시지에 맥주를 사들고 축구를 봤는데...ㅜㅜ


내일은 더 편한 길을 걸을 예정이라 처음으로 아침을 먹고 느즈막이 출발하기로 했다. 어제 못 잔 잠까지 푹 잘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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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gue Río Arga Ibaia


주비리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있는 알베르게.

여덟 개 정도 침대와 남녀 화장실 하나씩 한방에 있는 구조.

주인아저씨가 너무 친절하시고 특히 특유의 미소가 다른 사람들 기분까지 좋게 만든다.

아침식사까지 포함이라서 늦게 출발하는 경우 토스트를 챙겨 먹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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