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아(Sarria) - 포르투마린(Portomarí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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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기에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알랭 드 보통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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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격양된 분노나 원망, 혹은 절제하기 힘든 사랑이나 행복을 표현하는데는 익숙하다.(그 마음이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달되는지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아주 작은 슬픔이나 사랑, 아쉬움과 미움을 표현하는데는 모두 너무 서투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한줌의 사랑이, 앞으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너를 향한 조그만 미움이 날이 갈수록 커져서 결국엔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까 걱정된다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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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에 일어났다. 시작부터 일행들과 떨어져서 혼자 걸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그런지 연무가 뿌옇게 끼어있었다.
사리아부터는 사람이 많아진다더니 진짜 엄청 많아졌다. 느릿느릿 걷는데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면서 햇살을 비추더니, 연무에 빛이 산란되면서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요즘 다시 날씨가 더워지고 있지만 이제는 더위마저 익숙해져 걷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 가끔 이렇게 길 한가운데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기분도 좋아질뿐더러 처음보는 악기가 신기하기도 하다.
중간에 쉬었던 바에서는 강아지 두 마리가 발 밑을 자꾸 지나다녔다. 잠시 후에는 지난번처럼 자유롭게 도네이션을 하고 간식을 가져갈 수 있는 곳을 만났는데, 걸어가면서 수박을 먹으면 맛있겠단 생각에 수박을 챙기고 도네이션을 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는데 거기 있던 할아버지가 과일을 더 챙겨가라고 이야기해주셨다. 그래서 뭔지모를 연두색 자두같은 과일을 하나 더 챙겼다. 수박은 생각보다 달달해서 맛있게 먹으면서 걸었다.
100킬로 표지석을 만났다. 다들 여기서 사진을 찍거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왜 사람들은 100킬로에 의미를 두는걸까, 나한테 있어서 100킬로는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바에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술을 마시면 알딸딸해지면서 발이 무거워지지만, 그 덕분에 더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바에서 다시 출발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기념품 파는 가게를 만났다. 생장에서 조가비 껍질을 안 챙겨와서 하나 살 생각이었는데, 이쁜 조가비 껍질들이 많았다. 게다가 가게 안에서는 봉지라면과 컵라면, 김치와 햇반도 팔고있었다. 고흐 그림 느낌이 나는 조가비 하나와 컵라면을 사고서 가게 안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먹으면서 보니 여기저기 한국어가 적혀있는 엽서, 손수건같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가게에서는 계속해서 BTS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꽃 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다보니 어느새 오늘 목적지에 다다랐다. 포르투마린, 마을 앞에 큰 강이 흐르는 곳이다. 마을 입구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 바로 알베르게로 향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잠깐 낮잠을 잔 후, 마트에 가서 내일 챙길 음료수와 간식을 샀다. 그리고 곧장 레스토랑에 가서 뿔뽀와 다른 메뉴들을 시켰는데, 어제 먹었던 뿔뽀가 너무 맛있었어서 자꾸만 비교됐다.
식사 후, 숙소로 다시 돌아와 잠깐 짐 정리를 하고, 낮에 건너왔던 다리를 다시 건너갔다. 걸어오면서 보았던 벤치에서 지는 해를 보기 위해.
벤치에 앉아 얼마 남지 않았던 책을 마저 다 읽고나니, 해가 건너편 산등성이 바로 위에 떠 있다.
그런데 그때 오른편에서 소방헬기가 날아오더니 강에서 물을 실어나른다. 처음보는 신기한 장면에 다리로 달려나가 눈앞에서 물 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산 너머로 해가 저물어갔고, 고요한 물가 위에 나뭇잎이 떨어질 때처럼 약간의 떨림과 설렘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노을을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했다. 어떤 생각도, 고민도, 어느 것의 끝자락도 잡지 않고.
그러다 곧, 노을에 물들어 어느 형상으로도 인식될 수 있는 불그스름한 구름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바라봤다.
노을에 적셔진 구름은 며칠 전 보았던 파도치는 모습이기도 했고, 언젠가 비행기 위에서 바라보았던 해안가 도시의 모습이기도 했고, 길게 늘어진 퇴적암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앞으로는 석양에 물든 하루의 끝자락이 있었고, 왼쪽 어깨 편 위에는 점점 차올라 이제는 반절을 넘긴 밝은 달이 떠있었다.
알베르게 문이 밤 열한시에 잠기는 까닭에, 별까지 보고 들어가려고 했던 생각을 접고서는 숙소로 돌아와 일기를 쓰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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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ona de Ponte Hostel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시설들이 모두 깔끔하다. 옆에 작은 바도 같이 운영하는데 콜라가 비싸다. 하지만 여기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뷰는 정말 멋있다.
여기서 직원분들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면 잠깐 에어컨을 틀어주는데, 정말 시원하다.
다만 침실은 밤에 환기가 안된다. 그래서 엄청 덥다. 그리고 밤 열한시에 문이 잠긴다.